영화 '청포도 사탕'과 '피에타'의 디스플러스 하모니를 일요일 아침 날리면서
브금의 힘이 필요하다. 엔니오의 일페니토.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의 감수성의 분열. 누군가를 분열시키는 듯한 나의 이러한 전두환적인 쓰임. 읽으면 그런 뜻이겠으나, 나는 내가 마치 숱한 감수성의 분열을 몸소 겪은 주체인 것처럼, 고로쇠 수액을 지리산의 세상의 중심에서 튜브로다 흘리우는지 모르겠다. 나는 김기덕 감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본 영화는 별로 잔인하지 않은 영화이고, 수유리 한신대학원에서 혼자 텅빈 휴게실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인가 하는 영화의 말미를 보고 있는 감독학생을 함께 보았을 뿐이다. 영화도 보고, 극단적으로 눈이 내리는 기분의 수류탄 텅빈 하우스. 그것의 뇌막적 계급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내게 재밌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이 무슨 씨츄에이션? 하면서, 별로 재미 없다고 했다. 감독은 남준팩의 한 작품 제목처럼 무궁동하면서, 삼각형이 안으로 끊임없이 접히는 별스럽지 않은 작품, 약간 서운해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어로,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작명적인 원동기가 있다. 우리는 모두가 포스트모더니스트였었다. 김기덕 감독을 보라. 뭔가 유채영이 머리 깎고 활동할 때, 깡패 비슷한 사람으로부터 스님이시냐고 했다는 일화의 양명학 같지 않은가? 스님 같지 않은가? 스님은 공부를 못한다. 공부를 잘했으면, 그나마 제도권 대학, 제도 샤프 쓰면서, 때로는, 샴푸의 요정도 만나는 철학과 학생이나, 약간의 비존재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회전 반경은 크고, 부정확함도 끌고 다니면서, 내가 오토바이로 광주에서 서울을 가는 동안, 부산 찍고, 후쿠오카 다녀오고, 홍콩 갔다가, 불법체류, 라오스 갔다가, 트라이앵글, 그냥 말로만 듣고, 잡지사 기자 했다가, 해외여행 사람도 됐다가, 히말라야 가서, 삼세계에도 정신이 있다는 응원심을 받고는, 쓰리아이즈, 만화 그림 그리고, 북경 갔다가, 북한 갔다가, 탈북자 했다가, 체력이 좋아서 헤엄쳐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간첩했다가, 서울을 가는 것이다. 서울은 포스트모더니즘. 아직도, 아직도 실감이 되지 않는가? 서울은 반드시 서울이 아니지만, 광주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불목하니, 서울을 가는 것이고, 광주에 돌아오니, 왠지 모르게 똑똑한 것 같은 착각, 곽백수인가 하는 작가의 트라우마 만화에서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프로야구 선수가 실은 알고 보니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감의 결여가 플레이를 떨어뜨리는 것일 수 있으니, 조금은 과도할 만큼 자기를 북돋아보라고 해서, 삼진 아웃을 당했는데도 돌고 있더라는 에피소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내 앞에서 영원히 부자인 것처럼, 십년 넘게 서 있는 우주와, 그럴 연, 한맺힌 사연과 자기도 단위 시간적으로는 지독하게 가난함을 껴입고 있다. 어렸을 때 내가 동양이고, 그들이 서양이고 할 때의 분업정신이 그나마 좋았다. 실제로 한국의 드라마와 교회 근처의 국악 학원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한번 올라가 보았다. 그것의 발룬테리즘은 완전한 스페이스가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는 교양을 갖게 되었고, 오직 한 사람을 매개로 한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판단이 그러해서, 홍콩과 미국은 저마다 난을 치는 듯한 쌍발 로켓들을, 누가 주인할 것인지, 조금의 뒤돌아봄 없이 날리게 된 것이다. 그것의 문명 문화적 속성과, 사나움은, 내가 있어도, 없어도 그러했겠으나, 사도행전으로 신앙고백을 일주일에 한번씩 하다보면, 꼭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복음 삼장십육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양은 내가 다니는 학교, 내가 사용하는 학용품, 절대 더 비싼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암벽에서 꺼낸 듯한 입는 옷, 그리고 존재와 무 할 때 무적 궤도 안에 있는 영화 보기 안에서의 계림적인 폭력성.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철학적 이성이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선언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서냉전이 지독했을 수도 있는 때였지만,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교육을 가로막고, 영혼을 짖이기자는 이념은 기록과 더불어 발달한 역사 시대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없었으니까. 참 표현이 보다 잘 맞는 것이, 동서냉전이 사인 코사인의 장난과 같았다면, 어린아이를 학대하자는 거짓 교사의 종교적 색채는 탄젠트와, 탄젠트도 현재하는 것이니까,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 열심으로 노력해서, 자본주의 문화 비평을 했다 하는데, 그것이 자기들 당원들이 설탕 당 당의 질서라는 목적으로 인민들에게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언제나 그 자리에, 불이 켜지지 않는, 그러나 별빛으로 도리어 신비롭고 아름다운, 크기가 더욱 커 보이는, 서석대와 입석대의 무등산 마루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적군이고 나발이고, 거의 모든 것과 싸운다. 그것이 별 성 자 성리학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인가 하는 영화는 그때 함께 보는 것으로 말미만 조금 보았지만,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선한 탄젠트. 뭔 말인지 알지 않은가? 스님들의 내리꽂히고 싶은 망심이란 것은, 불자들에게 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한 것인데, 그것이 다만 리의 측면에 있다고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아닌 것이다. 두께라는 말은, 두 깨끗이라는 말이다. 그것의 방식은 대암산의 선점 같기도 하고, 해안마을이기도 하다. 사람이 높여져도, 바람과 싸우고, 자연을 보다 관찰하고,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국가에 대한 유니폼이 늘 정확하다. 거대한 통신탑은 왠지 모르게 눈물 겹고, 벙커에서 커피를 마시면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과도 커피를 마시는 예를 차리는 듯 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강원도 군인들이 수통을 탄띠에 달고 진지에서건 전술도로에서건 달리고 있으면, 그것이 그렇게 애잔하고, 뭐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러하다. 타는 목마름은, 정확한 뜻이 아니라 외국말 같은 식민지 조국 현실의 빼앗긴 성경에서나 가능한 표현이다. 우리가 잘나가는 회사원들도 동시성적으로 운동권의 박력분일 때에, 혹은 강력분, 잠깐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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