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애국과 멍청한 브로드 그리고 갈 곳 없는 미국 사람들......
사실 배우는 학생들이 진실로, 디플로마가 남발되지 않는 참다운 졸업자가 된다는 것은, 더스틴 호프만, 졸업처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세스 로빈슨. 마지막 장면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그는 신임 미국 대사 리퍼트처럼,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 원컷 원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미국 영화는 미국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의 화학 반응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 다들 미국 언어를 쓰고, 행복해도 미국 사람들이 행복하고, 계획해도 미국 사람들이 계획하며, 죽어도 미국 사람들이 죽는 것이고, 사건이 잘 마무리가 되는 것도 미국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펜 케익 플룻처럼, 달콤한 시럽 같은 것이다. 이번에는 시럽을 갖고, 남녀가 전자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패러다이스. 피비 캐츠 같은 것이다. 혹은 블루 라군. 아이비 리그의 양대 산맥. 블루 라군. 패러다이스. 공부하던 한국의 주자들이, 그 당시 복제된, 디엔에이가 아니라, 복사된, 카피된, 비디오 테이프로 열을 올렸던. 그것은 개인 교수도 그렇고, 프라이빗 스쿨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비 리그로만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핑크빛 로맨스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 알 수 없는 긴장의 연속 선상에서, 동양적인 주자학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들을 보고,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일으킨다고 하면, 이번의 리퍼트 사건처럼, 이상한 애국 같은 것이 촉발된다고 하면, 단번에 자기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의 김지하드가 엄청난 자금력을 갖고, 미국에서, 미국의 정신을 썩게 만드는, 시쳇말로 좀비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에프비아이 폭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 그리고 미국 사람들마저도, 그것들의 아들이랄 수 있는, 프레데터와 터미네이터를 사랑하였다. 프레데터와 터미네이터는 그런 의미에서 김한민 감독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이노센시였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 후속작들이 볼품이 없고, 그런 작품을 다시는 만들기가 어려운지, 좀더 본격적인 전쟁 영화, 좀더 본격적인 에스에프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데터와 터미네이터를 능가하지 못하는지가 증명이 되는 셈이다. 프레데터는 아이노센시가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이자, 고발이기도 했다. 보이는 것은 모두가 인터내셔널한 전사들인데도 불구하고, 유니버셜 솔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프랭키의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민이 없이, 권력의 하수구가 되는 청소년은 다만 성년이 되면 투표권만 있을 뿐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성실하고, 세계 각국의 신비주의 카발라의 민중적 오라에 많이 합성이 되었고, 뿅가는 음악, 뿅가는 노래를 많이 만들고 불렀어도, 그림도 많이 그리고, 가난하고 선하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 편에 많이 섰어도, 그렇게 꼭두 새벽에 눈도 부빌 수 없는 아침 일찍 밥 먹고 이야기를 한다는, 어쩌면 세미 누드 할 때 세미 고문 같은 시간에 있는 미국 사람을, 늙은 청년, 어쩌면 한국으로 유학온 결혼한 청년을, 강력하게 해하는 우주 암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슬픔을 준다. 유니버셜 솔져가 그렇다고 보면 피동적 의미에서의 아이노센시를 해한 것이 되는 것이다. 프레데터가 위대한 것이, 유니버셜 솔져가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노센시가 되기 위한 피나는 전투가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터미네이터. 터미네이터가 재미 없다는 사람은 없다. 그것의 원투. 원투 원투. 그것의 원투. 대극장에서 투를 보았을 때의 우주적인 만족감은 미국을 피를 나눈 혈맹으로 느끼기에 아무 손색이 없었다.
이상한 애국의 이번 발로가 분석적이 되는 것은, 멍청해도 되는 반일 감정에 편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의 캐츠는 단순하게 전쟁 반대이다.
미국은 지켜볼 것이다. 마땅히 할 일이 없고, 그들에게는 전쟁 반대 바지락 꼼지락 미친 년 댈 수 있는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브로드는 끝없이 멍청하고, 멍청을 상호 방관한다.
국사가 따로 있고, 드라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국사는 브로드에게 당하고, 브로드는 드라마에게 교육을 넘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가 교육적이라는 말은 약간 슬픈 시럽으로 전자방에 들어가는 남녀 같은, 졸업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이다.
김옥균은 일기도 쓸 수 없는가 하는 반문적 명제........
영원한 아이노센시........
돌직구처럼 멍청한 문답법의 정치적 종북방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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