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문학론. 토끼이야기를 중심으로
이태준이 누군가? 상허 이태준. 소위 듣보잡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나는 나다. 나는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정하지 않으면, 아주 죽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마땅히 죽을 방법이 없고, 죽자니 이런저런 가능성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게 이태준의 문학은 매우 생경하고, 풍경소리, 바라춤?을 추는 승려의 철편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물론 나의 문학적 두부론에서 보면, 이태준의 것이 가장 현격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묘하게 그의 것은 동남아의 느낌이 있다. 동남아. 미장센 기법으로 하면, 정동남. 포네틱한 씨밀레러티를 연출하자면, 정남진. 우리가 연예인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특히 정동남 정도의 사람일지라도 지나다 보면 기분이 좋은 것은, 성남시향의 림스키 코르사코프 연주의 것처럼, 이성적, 그러니까 로고스의 것에서부터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기법을 정식으로 갖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무슨?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동남이 저기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연상해 보라.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싶으면, 내가 오늘 내미는 연예인 카드는 정아름. 사람들은 좋아할 것이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은 변화에서 소셜 컨센서스를 느끼는지. 정아름. 정아름이 걸어간다고 상상해보라. 그녀는 학자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는 트레이너다. 그리고 미코 출신이다. 워낙에 줄임말이 유행이어서, 미코가 뭔줄 순간 몰랐다는. 그런 개인적인 뇌피질의 이야기를 할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아직 결혼을 안했다. 그녀는 대단한 패셔니스타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는 여자다. 오직 건강 하나로만, 사람들에게 심풀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다. 건강에는 기법이 필요하고, 사랑에도 기법이 있는 것처럼, 요령과 아령이 있어야 하고, 끈기와 마침내 우리를 감싸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피직스.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메타콘. 메타피직스. 내가 메타피직스를 잘했던 것도, 젊은 시절에 먹었던 메타콘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먹고 한신대를, 수십보를, 정문에 작게 있는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짝퉁 메타피직스인줄 알고, 꺼림칙했으나, 그래도 상업회사에서, 콘을 만들어서, 메타를 지향한다는 것을 멸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아름. 나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꺼내서, 맛있게 먹었다. 광고의 내용은 어떤 키 큰 여자 탤런트와 함께 유에프오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의 흐름, 의식의 흐름, 생각의 흐름이 두렵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성적 사유에 따르면, 도저히 포착이 되지 않는 너울이 있기 때문이다. 울둘목. 그러하다. 우리는 울둘목에서 산다. 우리는 평지에서, 이성적 사유를 갖고, 김제살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인이고, 이순신 장군은 우리를 늘 울둘목으로 이끈다. 우리는 파선하고, 사람이 이렇게 죽던지, 저렇게 죽던지 하는 결말에 속절 없이 끌려간다. 그렇다고 보면, 그와 같은 단편 문학의 함수로써 보면, 이효석의 산과 메밀꽃 필 무렵은 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밤길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자리가,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랑을 약속했던 자리이기 때문에 더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작품 년도가 궁금하고, 특히 밤길 같은 것은 이차대전의 종전 같은 것을 예시하는 느낌도 있다. 그것의 방식까지도 예언한 느낌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는 매우 다양한 능력이 있는데, 지혜도 지식도 방언도 방언을 해석하는 능력도 있다고 했다. 이태준은 문학론이라기 보다는, 무당론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문법적인 로고스가 토끼의 철제 우리처럼 분명히 드리워져 있는데, 이태준은 우리 사는 세상이 충분히 개념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제목이 토끼이야기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태준의 문학론은 자기 혼자 그의 뇌피질 안에서, 그렇게 점점 커져서, 작은 토끼 가죽이 찢긴 것일 수 있다. 그래도 바로크 음악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고, 고전주의의 이런저런 음악을 전공하는 것이 좋다. 셰익스피어와 헤겔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좋고, 약간의 동시대적인 느낌이 있대도, 하이데거의 존재 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준은 마치 그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인간 토끼론의 형이상학을 제안하면서, 그 안에서 사람은 살아남던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다 하는 것으로 결론내린다. 어째서 그것이 중요할까? 그것을 언급할 만한 가치, 지금 당장의 신속성을 느끼는 것일까? 베로니카의 이중 토끼. 여자들의 노동은 도움이 된다. 토끼 노동. 그것의 비지엠. 나는 여자들을, 누나들을 무시하지만, 이태준은 마치 지금의 나에게 무시하지 말라고, 마지막 장면을 무시무시하게 묘사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에쓰닉하게 긍정의 시편을 쏘면서,
죽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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