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학은 어디서부터 기원하는가? 삼국유사는 일단 진부하다 하고, 신시본기.......
단풍이 서로의 집안을 어루만지는 사이끼리 이런 말을 나누었다. 젊었을 때의 만연으로서. 자기 아들과 그쪽 딸이 장성하면 결혼시키자고. 지금은 잘 보지 않지만, 중원교회 장경동 목사의 한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경우의 수를 따지면 다음과 같다. 한쪽이 선남. 한쪽이 선녀. 최고가 아닐 수 없다. 신도들과 비신도들은 좋다고 박수치고. 한쪽이 선남. 한쪽이 안선녀. 한쪽이 선녀 한쪽이 안선남. 두쪽다 안선남 안선녀. 제일 비참한 것이 네번째이나, 여기서부터는 물리학 공부를 서로 해야 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한계효용의 법칙, 소숑의 어제 그 음악, 네번째는 서로 밑질 게 없다. 페미니즘은 들불을 들 것이나, 남자가 넘치게 굴면 조금씩 독살시키면 되는 일이다. 서로 생각 없이 말 퍼하고, 규격에 맞게 돈 엄청 쓰고, 규격에 맞게 돈을 많이 끌어다 쓰고, 남에게 전가할 일이 있으면 전가하고, 흉볼 일에 대해서는 성리학적인 안테나를 빙빙 돌리는 것이다. 촉나라. 蜀과 獨은 하나요, 慧도 거미줄과 먼지와, 꽃가루와 먼지와, 공부 안하는 책, 세상에서 가장 저주 받은 것으로서의 그런 대량 생산과 산업 대량 생산의 책의 만남. 촉은 좌방변을 두고도, 비참하다. 독일철학은, 보았으면 슬픔으로 위로하는 철학이며, 문장들, 보지 않았다면 보편과 특수를 헤아리는 지혜의 높은 성이 아닐 수 없다. 드럼을 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성욕이기보다는, 필 콜린스. 내 예전에 여자 친구였던 현정이가, 전남대 정문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는데, 이것은 정말 남의 나라라는 차원에서의 티벳 포탈라궁이거나 오사카 궁성 같다, 외국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필 콜린스가 키가 작다고. 그래서 저렇게 앉아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 같다고. 그 말에 나는 펀적인 의미의 피직스와, 물리학이라는 차원에서의 피직스과 동시에 작동하였다. 그리고 내 옆에 분석력이 있는 연예 전문기자가 있는 것이 반가웠다. 때가 벌써, 구십일년 이년이니까 이십년 전이다. 나는 조개종을 싫어하나, 사람들은 좋아한다. 건물들이며, 사람들이 탱화처럼 모여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설법도 갈수록에 듣기가 좋아진다. 그것은 다만 인사치례가 아니다. 무둔한 스님들의 뇌살이지만, 이유가 어떻든 간에 처음으로 각지가 생겼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스님이 되고, 여자가 처녀가 되었대도 결혼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남자가 주자학이 되고, 여자가 양명학이 되면 최고의 커플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 장단의 표현대로, 강약중간약, 덩기덕쿵더러러, 쿵기덕, 네박자 쿵짝 그렇게시리....... 주자학은 신학과 문학을 동시에 전공하는 나와 같은 사람, 한 사람 뿐으로 인구수가 정리된다. 무엇 하자는 것인가? 이런 말은? 사람들은 비열하고, 신학적으로 절편 선언을 하거나, 문학적으로는 여러 여자를 개썰매하고 싶어 한다. 전자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는다 할 것이고, 후자는 반야지가 너무 가혹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차라리 그게 낫다. 양명학은 갈수록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독일어로 그룬트. 손오공의 군두운이 없기 때문이다. 유시무종. 동시작계. 걸도 여자이며, 계도 여자이다. 중국은 여자 없는 계국이다.
얼마나 삼국유사가 아름다운지 모른다. 삼국사기는. 그리고 문학적 현실을 놓고 보면, 한단고기의 신시본기는 바닷빛의 장관이요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일본에서도 독자적인 백제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을 약속하는 것이, 약소쿠, 바로 백제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의 그림자에서처럼, 무엇이 타는지 모르는 불길과 연기, 인육을 탐하는 새들과 사람들의 신음소리, 그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도 돼지와 돈을 밝히는 것이다. 서울은 지금의 국제 정세 속에서는 참양명인데 말이다. 처음에는 약간 춥고 가난했던 소울이 반짝이는 서울을 갖게 된다는 것. 돌로 된 현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숲과, 조경수들의 만남. 서울에서 문을 열면,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글쓰기가 없고, 논문을 일년에 한 편 쓰지 않으면 쫓겨날 수도 있다는 참여정치. 참다운 인문정치. 그것의 피아노적인 청각적 타격. 새가 궁금한 게 아니라 이름이 아름답다 해서, 크낙새. 그리고 한국어 접속사 같은 딱따구리와 카나라즈. 문예지를 한 달에 한 번씩 받고, 오토바이 잡지도 한 달에 한 번씩 받는다. 그것의 서울 깊은 동작들로서의 소포클레스. 나는 아리스티포스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미학과 아리따움, 저 멀리의 전칭 명제로서 필연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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