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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마리 앙뜨와네트 같은 인딜라(indila), mini album.....

by 마음대로다 2015. 12. 30.

마리 앙뜨와네트 같은 인딜라(indila), mini album.....

 

 

 

 

 

 

 

 

인딜라는 자금 세탁이 되어 있다. 그녀는 구십년대, 적어도 팔십년대 출신 같으나, 보니까 칠십년대인 것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것이다.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원래 센티멘탈이라는 것은, 남의 슬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니까. 그것이 김동리의 달이 나오는 소설에서, 만났을 수 있다. 웃거나, 대충 울거나 하는 것에서는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어째서 유럽은 에쓰닉해지는 것인가? 그것을 아는 하이펜치히 교수가 없다. 대학이 아니고, 이름이 아니고, 존경의 표현도 아니다. 그냥 높은 곳의 나사를 스페너로 돌리고 내려오는 스피노자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멋지게 보이고, 그것이 한 템포 앞서간 서양의 멋진 모습처럼 보였던 포도주와 버터 바른 빵이라는 것은, 지금은 이미 우리 입에 녹아 사라지고 있다. 누가 그렇게 렐름렐름 거리느냐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어를 과시한다. 투어너 단스 리 비데 그런 노래가 있다. 가슴이 단도직입적으로 아프고, 두번 아프고, 세번도 아프다. 렐름이라는 말이 단지 그런 뜻은 아닌 것이다. 안셀름. 그러나 영토라는 것이, 영역이라는 것이, 렐름렐름 거리는 것이라는 표현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를 빠르게 성숙시키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사해동포주의이다. 배가 고프면, 논과 밭을 얻기 위해 싸우겠지만, 제발, 오 제발, 그러나 렐름, 영토로 사람들을 몰고 가서, 얻을 것이라고는 무엇인가? 외교부 직업 구하기, 어드미니스트레이션, 기자들 할 일 만들어주기, 그럴 듯한 국가적 기성복을 또 한번 입어보는 것 밖에 더되겠는가? 학생이 그 나라 국문학과에 입학한 것 자체가 경사인 것이다. 경복궁이고, 경회루인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한신대 입학한 것 자체가, 경복궁이고 경회루였던 것이다. 선배 김현이 있던 서울대에 내가 들어가지 못한 것이 경복궁 방화 사건과 비슷한 것이다. 불에 타고, 사람들은 경회루의 물을 퍼다가 애써 불을 끈다. 거짐 다 탔는데, 겨우 불을 진압했는데, 이번에는 경회루가 불에 타는 것이다. 투어너 단스 리 비데. 그것은 슬픈 우리 어린 악한의 템포이고, 우리들의 육체가 궁정비사에 소진하는 것 같은 느낌 그 자체이다. 그것은 느낌만은 아니고, 그렇다고 관념도 아니다. 느낌 그 자체는 느낌으로부터 나오지만, 똑같이 반복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리석음을 말할 때, 대게의 경우는 재발하는 것을 표현할 때가 많다. 그것은 경복궁의 방화와, 경회루의 방화를 연속하는 것 같은 것으로서, 인세선트, 우리가 대원군이 중건했다고 배웠는데, 교실에서 학생이 배우는 중에, 창 너머로 다시 또 한번 불에 타오르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내가 경복궁에 있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대로 멍청하게 계속 흙바닥 위에서나 군림하는 허균이라는 것이 영 성가신 풍경이 아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숙해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년초의 왈츠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왈츠는 정해진 박자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곡과 오케스트라의 오랜 연관성 때문에, 품격이 있고, 넓은 홀에 걸쳐 훌륭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쾰른 성당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악마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학생들을, 학교들을 유지하고 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엄격한 서양의 음악 예술은, 더 딱딱한 말라식적 악마의 본질 때문에, 보다 사람들을, 어린아이들을 호되게 가르친다. 그래서 열 살만 되어도, 우리 나이로는 스무살 언저리에 가까운 내면적 화성을 갖게 된다. 늘 춥게 걷고, 서로 별로 큰 소리로 대화하지 않으며, 축제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채찍질을 하면서 흥을 돋군다. 테크노 뮤직이라는 것이 사실 음악의 아마존과 같은데, 대충 검색만 해도 훌륭한 것들이 제법 많이 있다. 악마는 테크노 음악을 방관하는데, 왜냐하면 유럽이나 미국이 과학 기술이 빼어나다고 세계 인민들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클래식의 중간 기지를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도 또한 음악의 자연적인 템포로서의 공허함이 되는 것이다. 영혼은, 특히 게오르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에서의 영혼은, 갈 곳이 없고, 독일 테크노 음악 축제에서 공중으로 증발하고 만다. 사람은 솔직해야 하고, 육체는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죽음이 닥쳤을 때, 방황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 방도를 찾게 된다. 그곳은 평민과 귀족의 교차점으로서, 인딜라 마리 앙뜨와네트가 사람들을 애써 길어올리는 주소지이기도 한 것이다. 소박하고 깨끗한 평민은 귀족이고, 냄새나고, 냄새의 종류를 많이 알고, 맛이 없는 것을 일부로 연출할 정도로 예술적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은 평민의 걸음걸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인딜라. 인딜라. 우리 불쌍한 마리 앙뜨와네트. 교향곡을 많이 들으면, 착시가 생기고, 그것의 자유로운 영혼과 문자적 가능성은 결코 허영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돈꼬자크도 듣고, 바이칼도 가고, 성 소피아 성당도 가보고, 알제리, 그리고 피라미드도 보고, 지중해를 한번 바캉스를 가서 죽은 것처럼 꾸미고는 오년 정도 뒤에 돌아와도, 어서오게나 빌룡쉐, 앞으로는 그래선 안돼, 하면서 사장이 적극적으로 중재를 봐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여행 프로그램은 많고, 그것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는 많고, 그것을 위한 여행지에서의 프랑스 말들은 아무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 만능주의, 역사 패권주의, 역사 구조주의에 빠져서, 그것의 소스테네, 다시 말하면 인식소만을 저장하다 보면, 얼른 체력을 가지는 것 같으나, 허구한날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 이정재의 하녀 같은 영화나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의 굼벵이적 시각은, 실제로도 화려하고, 그것의 아치는 고건축과 많이 비슷하다. 우리는 화엄사와 쌍계사만 다녀와도, 마음에는 엠육공 탄알과 같은 크레용들이 가득해지는데, 불분명한 개념들은 도저히 비예술적인 걸음걸이로는 떳떳하고 오래도록 건강하게 걷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건강함은 쌍떼인데 말이다. 쌍떼라고 해서, 더더욱 불분명한 관념들을, 초자아들을, 노뜨르담의 곱추처럼 이고자 하는 것이다. 분명, 프랑스적 건강함을 위해서, 아라비안의 로렌스 시계는 예정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도모지, 단지 카페에 설치미술이라도 하라며, 값비싼 오토바이를 선물로 사다주었는데, 마다하고, 도리어 악을 지르는 것이다. 그런 본질에도 이르지 못하는 질병과도 같은 질주는 싫다면서 말이다. 유럽에서, 특히 파리에서 아라비아로 다녀오는 길이라는 것은, 어린왕자와 야간 비행 비슷해서, 오토바이로 다녀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프랑스에서 출발해서, 이태리로 가는 방법도 있고, 독일 그리고 체코 헝가리로 가는 방법도 있다. 저마다 색깔이 있고, 저마다 오스트리히가 있고, 저마다의 아름다운, 처음 만나는 캐쓸들이 있다. 아무리 반복적이고, 아무리 이제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해도, 석재 건물이라는 것은 숱한 그 지역의 아버지의 눈물과도 같은 산물들이다. 석재 건물을 지으면, 보다 배타적이 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것을 짓기 전까지, 그리고 지으면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지은 다음에 어쩔 수 없이 콤뮨 의식이 발달하고, 그 다음에 배타적이 된다 해도, 원래의 배타성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피가 흐르고, 그것이 그러니까 석재 건물이 있다 해서, 보다 줄고 많아지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석재가 빛나게 채워지는 것이 좋다. 사람들에게 영혼적인 허영을 선물하는 것이 낫지, 그것이 결코 피의 하천적 그리고 절기적 순환보다 못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의, 모아놓고 보니 아름답고 위대한 시각적인 유럽이 생겨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가? 유럽과 아라비아는 패키지인데. 인딜라의 슬픈 곡조가 모스크의 것보다 더더욱 슬프고 일렁이면서 다가오는 듯 하다. 우리를 다만 물성에서부터 구원해달라는, 오래된 기도처럼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