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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어제 육룡이 나르샤를 보면서 안타까운 드는 생각이.....

by 마음대로다 2016. 2. 17.

어제 육룡이 나르샤를 보면서 안타까운 드는 생각이.....

 

 

 

 

 

 

 

 

우리가 친미하는 것을 별 생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북한이 친미하는 것을 반대할 근거가 있을까 싶다. 그것은 매우 하이에크한 문제이다. 하이에크는 아는 사람이 있어도, 막상 하이에크가 필리핀에 불어닥쳤을 때는, 그와 같은 흑기사를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일본도, 북한도, 중국도, 남한을 계속 박해미로써 밀고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저절로길에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 것일까? 두 가지 사건이 심상치 않게 겹친다. 하나는 남한의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참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에 정박한 잠수함 사건이다. 우리는 소설을 배울 때, 그것이 산문정신을 갖고 있고, 그것이 시적 상징으로 점철되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고 배웠다. 누가 그에 관한 대표 학자이고, 그것의 변용이 무엇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산문정신은 맑시즘 계열에서나, 언어학 계열에서, 마치 약속한 것처럼 만나는 광장이 되었고, 그렇다고 그것의 증거가 된 것 같은 작품을 만난 적은 없다. 어째서일까? 만일 불만을 산 시적 대상이 있다면 누구이고, 그것의 과도기가 있다면 누구이며, 그것의 완벽한 반도체가 무엇이라고 여기면 되는 것일까? 그와 같은 주장이 흐지부지가 된 것은 세가지이다. 하나는 시가 변혁적이지 않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적 대사를 우리가 산문으로 보아야할지, 아니면 서사시로 보아야할지, 아니면 시로 보아야할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문학적 주체에 대한 설명 능력이 없이, 다른 곁가지 현상만 갖고 이야기한다면 능력도 떨어지고, 프로자익하게 또한 말하자면 능력이 또한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핵심적인 것인데, 소설이 과연 변혁적인가 하는 문제점이고 문제의식이다. 소설은 죽는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라스베거스 높은 타워에 있는 놀이기구처럼, 거대한 높이에서 한번 떨어지는 것처럼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소설은 화수분 같다. 전영택이 선각자가 되는 것은, 선구자라고 해도 말이 맞아서, 웃김이 생기지 않아, 선각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더욱 맞는 말이어서, 더더욱 웃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밥원이라는 모텔에서 잠을 청한 것이, 내 존재 자체가 짓눌린 것인가 사람들의 예상과는 또다시 빗나간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선구자나, 선각자나. 일송정. 집안이 빈한해져, 부부는 따로 떨어져서 지내게 되었고, 어느 겨울 추운 날, 부부는 서로가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눈이 내린 날에, 아이만 혼자 그 사이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견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리얼리즘이 상당히 궁금해지는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래도 틀린 말이 아니고, 있었던 일이라 해도 별로 사실 추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가 전영택의 순수 창작이었다고 해도, 그 말까지도 내가 팔랑귀라는 사실에 별로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전영택의 그의 글은, 홍염에 준하는 표현주의적인 능력이 있다. 그것도 주제적으로만 보면, 탈출기에 준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는 루스해졌고, 단어와 문장은 입에 풀칠하는 립밤적인 칼싸움에 매몰되었다. 전영택은 그 부부를 아주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아주 부유한 집안의 남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어느 누가, 위대한 사랑의 신학 안에서,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또는 아들과 딸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나는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그것들의 잠재태와 가능태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은 게사츠. 그러니까 개장수인 것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경찰이 사람을 만난다면, 그 날은 세상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경찰도 밥을 먹고, 경찰도 잠을 자고, 경찰도 사복을 입고, 경찰도 데이트를 한다. 경찰도 아이가 있고, 경찰도 뉴스를 보고, 경찰도 육룡이 나르샤를 본다. 바로 그 경찰이 출동 명령을 받고, 바로 그 경찰이 입에 담기도 어려운 비극적인 사회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다. 그것들의 경계는 사실 희미하다. 주자가 보기에는, 누군가는 쾌락의 원칙에 빠졌고, 그것은 무의식이 되는 것이니까, 누군가는 계속해서 물고기를 들어올리면서 수산물 공판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아침에 씻을 때, 비누로 얼굴을 닦고 난 다음에 우리가 눈물이 디스퍼젼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다음으로 스킨과 로션을 바를 때에도, 우리가 우리를 떠나는 듯한 세포의 격렬함을 느끼는 것은, 그 다음으로는 우리는 끝없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경찰은 형식미가 있고, 내용의 무질서를 단속하지만, 그 이상의 형식미와 내용의 차원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는 권리가 있다. 소설이 비도덕적인 것처럼, 경찰도 인간이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 대해서 비도덕적인 것이다. 경찰은 사무실이 있고, 스팀이 있고, 경찰차가 있고, 봉급이 있고, 가족이 있고, 경찰 개새끼들은 다 있고, 존만 새끼들은 주자가 그것들의 아가리를 일년에 한 놈씩 찢어버리지 않으면 완전 경찰 부르조아인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그렇다면 그런 경찰 영화인 것인가? 우리는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는 사람은 선하고, 참다운 도시인이다. 포토샾의 눈물을 아는 사람인 것이고, 인간의 삶이 포토샵인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멍청한 경찰들이 출동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것들이 얼마나 포악한 고구려 경찰 깡패 영화에 의지할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인간은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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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의도(汝矣島)라는 한자 이름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마치, 압력이 높은 심해에 이르러, 상자가 찌그러지는 모습을 그려놓은 듯 하다. 내가 광주에서 올라오니, 오비이락이라고, 무슨 관계 기관의 후원을 받은 육룡이 나르샤가 반응을 하였다. 그러더니 멀쩡한 사람을 두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귀로 변신을 하였다.

 

부산에 미국의 찌그러진 잠수함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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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교육은 남자의 훌륭함에 의지를 한다. 남자가 빽빽하고 촘촘하다면, 여자는 기계 장치의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편이다. 한계에 이르러, 성경의 말씀처럼 남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또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조사 의처럼 여자들은 굉장히 빠르게 찌그러진다.

 

종합대학을 다니던 두 남녀가 결혼까지 하였다. 남자가 사범대학적인 풍모를 갖고 있었고, 여자가 그런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장을 적당히 다니다가, 역사교육학과에 재입학을 하였고, 국사 교사가 되었다. 그 정도만 해도, 아름다운 인생인 것이다. 단지 그런 것만 묘사하는 드라마를 만나고 싶다. 다만 그런 것만 창에 담은 역사 드라마를 만나고 싶다. 대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임신을 한 사람처럼 구역질이 나고, 유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며, 무명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을 때마다, 작가가 AK 소총을 소지하고 있는 흑인 소년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부산에 잠수함이 없는 것처럼, 순전히 그런 소재주의적인 관심으로 미국 찌그러진 잠수함이 입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감지하는 것은, 남자가 별반 다를 바 없이 단순하고, 직장 생활 무엇이 갑갑하고 단순했는지 별로 차별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두고 귀신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분이의 고백처럼, 도전 놈의 새끼의 위치 이동이 거의 박근혜적인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박근혜가 틈만 나면 외국을 쳐 나가더니, 요즘은 덜 싸돌아다닌다 싶다. 아무튼 남자가 귀신향을 얼굴에 발라도, 그것조차 없는 남자들보다는 남편의 멋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서울에서부터 나온다. 우리가 귀신에 들린다는 것은, 성경의 묘사처럼, 정신이 있기 때문에 들리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그래서 핀트가 희한한 것이, 독재자나, 살인자, 그런 무시무시한 악마들과의 싸움이 아니고,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그것은 같은 호흡이다. 같은 스킨스쿠버의 산소통이다. 그러나 후자에 집중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전자로서는 도무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선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귀신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여자가 예수의 감각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귀신향을 보고서는 그것을 치유해줄 요량으로, 그런 삶의 유식적인 도전 같은, 결혼했다가 끝까지 집안을 벽지 무늬의 조용한 소굴로 만드는 것을 참지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학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의 아이들 학대는 대부분 남자들에 대한 학대가 불가능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불륜에도 자유로운 남자가 아이들을 학대할 수는 별로 없는데, 티비는 그런 것을 영국의 건강 조사 기관처럼 따로 조사하고 연구하지는 않으니까. 그랬더니, 남자가 아이를 따라서 학대를 하는 것이다.

 

 

화수분에서는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였지만, 그나마 공자의 사당이 있는 중국을 넘어가면, 그처럼 아이들이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