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몇 편인가 어제 것을 보고
우리나라 이름 중에 철구라고도 있다. 어쩌면 이름이 멋지다 싶다. 우리는 철구를 통과한다. 그것은 흡사 메트로 폴리스 같은 미래지향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출근길에, 혹은 등교하면서, 어느 밀승과 맞딱뜨리고, 그 온 몸에 문신한 것을 처치하면, 밀승은 수많은 염주들을 목걸이가 뜯어져 쏟아지면서 쓰러져 죽어간다. 우리가 유럽을 보고, 중국을 보고, 일본을 보고, 아프리카를 보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그들은 철구가 없다. 그러니 죽음에 이르도록, 어느 한 필, 알약도 먹지 못해서, 감정의 충실성, 그리고 개명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다.
대게의 전쟁은 공부를 못한 것의 핑계이다. 시를 한편 쓰는데, 노트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동주 영화가 나오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일본에서, 북미에서, 시인이 나왔다는 말을 하승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런 식의 가짓점도 사실 라젠카세이브어스 잘 모르고, 있어도 계산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시를 쓸 순 없다. 그러나 붉은 철구를 많이 쏟아내면, 누구든 시를 쓰게끔 우리의 인더스티리아 도시는 구조화 되어 있다. 나는 그렇게 중경에 가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중경에서, 시인의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중국 절대 미녀와 아방궁을 짓느라, 오후에 나와도 좋다. 그것의 생애의 성실성은, 그다지 매질, 차이가 없다. 성경이 있고, 미국 영화가 있고, 미국 영화가 있고, 인도는 발리우드가 있고, 그런데 어째서 시를 타고르처럼 쓰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붉은 철구를 전체주의적으로 쏟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들과 저당 잡히고, 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우기에 순전한 생명체가 있을까 싶다. 배울 때 잘 모르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아프리오리는 마치, 식인 세계에 살다온 것처럼, 문명의 확신에 살고, 아무런 원시인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어, 우리를 야수파로 이끌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스탕달, 슬픈 열대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른 것을 모른다 하고, 예인 것은 예라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그래야 하는데 하는 말들이 늘 일본 여자들처럼 이이에 하는 것이다. 짓는 개들도 그렇다. 그렇다는 것인지 안그렇다는 것인지, 컹컹컹 하고 짓는다. 그렇다는 말인가? 컹컹 안그렇다는 것인가? 컹컹컹 안그런게 아니라는 말인가? 개들은 불쌍하다. 개들은 주자 앞에서, 영원히 예라고도 못하고, 아니라고도 못한다.
우리는 하소연할 길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저당잡힌다. 문명에 최대한 동일시를 이루고, 자신을 야수파에 일찌감치 솔직하고, 평생을 예니오 혹은 이이에 하면서 지낸다.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학자들에게도 듣기 좋은 것은, 예니오이기도 하고, 자기들처럼 이이에 하는 것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태초의 콘스티튜션 같기 때문이다.
한국의 철구는 중국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성경 속의 큰 아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탕자이기도 하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갔다가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방법론적인 것이지, 의미론적이거나, 실제론적인 것이 아니다. 형식논리적인 것이지, 심화학습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땅을 넓히고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먹을 것 못먹을 것을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이기도 하다. 화살을 하늘 높이 쏘아, 떨어진 곳을 알지 못하는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일본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도덕적이지 않은 문학과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고, 그래도 현지인보다는 많이 도덕적이 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유럽은 한국에서 해도 될 공부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것이다. 마땅한 대화자도 없어서, 더더욱 플라톤의 대화록을 읽다 왔다는 느낌만 강할 뿐이다. 아프리카에 가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서, 돈이 아주 많은 것이고, 경제적인 한도를 넘어서는, 다른 하나는 세상 아프리카라는 주의이다. 공부를 흑치상지처럼, 고전의 묵경처럼 아주 많이 못해야 하는데, 그것의 공통적인 분모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일종의 선천적인 두려움이다.
인간은 불쌍하다. 시를 정말이지 윤동주의 것을 교과서나 거울 삼아 한번 써보기를 권한다. 너무 나이브한 것 말고, 너무 하나마나한 것 말고, 진심이 담기고 표현에 적당한 기교가 있는 것으로다가. 마치 광주항쟁 때처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진심이 담기는 것을 써낸 사람은 돌려보내고, 쓰지 못하는 사람은,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크게 틀어놓고, 전경들의 방망이로 두들겨 패도 좋을 것이다. 맞으면서도, 그들은 예니오 예니오, 혹은 이이에 이이에 할 것인데,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침내는 누군가 예 예 그러고 아니오 아니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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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귀인이 오면,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죽음의 연장이기에, 자기 안의 생명이 그냥 먼저 반응하는 것을 어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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