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에이도스의 찬란한 수만개의 문이다.
온달장군 설화는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가? 대답하라 일구구칠. 나는 행복한 난맥상에 산다 할 것이다. 내가 답하면, 사람들은 채점을 매고, 답이 맞은 경우에는 다윗의 춤을 추면서 소고를 친다. 그리고 답이 틀린 경우에는 틀렸다고 직언을 하는 사람을 승진시키고, 애매한 경우에는 변호사를 부를 수 있다. 마지막의 것이 복지요 풍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학교 교육에 실망하는 것은, 동행하는 카메라 기법, 애매한 경우에 아무런 변호사도 부르지 못하고, 마침내는 틀렸다고 확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백제의 찬란한 학창 시절에는, 여의도의 쌍동이 빌딩처럼, 야간에도 만점을 받는 남자 여자를 꿈꾼다. 남자가 행여 삼백만원을 카드 결제할 경우에도, 탤런트 박진희는 괜찮다고 했고, 권오중이 며칠 있다가 또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욥기의 거대 주관의 성경 본문처럼 자꾸 묻자, 그래도 괜찮다고 답한다. 문법과 시간은 말과 사물의 사랑 관계를 지칭하기 때문에, 실제로 남자가 그런 경우를 겪는다 해도 박진희 만큼은 딱 그만큼은 괜찮다고 할 모나드를 선물 받을 수 있다. 모나드는 암석과 같고, 방과 같으며, 암석과 같은 의식의 혼자만의 방과도 같다. 눈물은 암석의 여러 다른 성분처럼 흘러내린다. 그런데 또 묻는다. 남편 월급이 삼백만원인데? 컨디션을 걸고, 진희의 시간성(temps)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괜찮다고, 자기가 벌면 된다고. 그 순간 남자들은, 남자들의 문학적 프라임은 일순간이나마 위로를 얻는다. 언제나 현실 추수주의의 철조망에 가슴이 찔리기 때문에, 남자건 여자건, 붉은 꽃을 붉게 하는 새의 가슴처럼, 또 누군가의 시처럼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시인의 길과 그것의 아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진희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우리들 사이에, 섬진강 모래사장의 코이노니아. 우리는 나이 이십에 그와 같은 이십대, 이데를 달성한다. 여의도의 쌍동이 빌딩은 만점 짜리이며, 부분부분 만점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일을 끝내고 돌아갔기 때문이라는 최고의 최상급의 부정형일 뿐이다. 애매한 답을 마침내 틀렸다 확진되는 경우에는, 우리는 낙심하며, 일을 하고 있는 중에 불이 나가는 것이라 할 만 하다. 우리는 쩔쩔 맨다.
나는 서양의 모든 새들이 떨어진 뒤에, 그것의 시화호 풍경, 삼국유사를 구입하기 위해 교보문고에를 갔다. 그리고 읽지 않아도 그것이 몰고올 사태를 직감한 듯, 보다 예쁘게 책포장을 했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삼국사기는 그 중간에, 순백의 백제식으로 말해서 읽었으며, 지금까지도 발굴중이며, 해석은 미완의 상태에 있다. 낮은 것을 디스커버리하는 것이 아니다. 높은 것을 닮을 뿐이다. 이런 말은 일선의 평론가들은 사석에서조차 할 수가 없다. 영어의 디렉트가 여기서는 효과적이고 빛을 발한다. 지적하거나, 때리는 디렉션이 아니다. 김화영의 이런저런 프랑스 현대소설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다. 뭔가 새 책을 보고 싶었다. 그것은 억지스럽게 말하면, 노아가 날려 보았던 새와 비슷하다. 물고온 것은 거울과 비슷했다. 보들레르는 모더니즘을 우연과 시간, 상피성의 의지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스탕달은 소설을 하나의 긴 길을 가는 거울이라고 했다 한다. 이런 디렉션을 말한다. 보들레르는 반타작의 기법이며, 스탕달은 흔하지만 말하면서 듣을 때에 늘 아름다운 이동 문학적 동일성이다.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 권오중과 박진희의 대화는 디렉션에 가깝다. 우리는 그 순간, 천재기가 있는 경우, 감수성, 한강물에 빠져 바보 온달과 공주가 사랑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그것의 입체, 혹은 물체는 대체 무엇인가? 반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늘인가? 아니면 땅인가? 아니면 나의 생명과 같은 내 옆의 나무인가? 어떤 선생님이 편집한 중고등학교생들이 읽어야 할 한국 고전이라는 책도 보았다. 정보는 가시와 같다. 삼국유사의 것은 읽지 않았다. 바보 온달 설화가 삼국사기가 출처라는 사실에 놀라 읽게 되었다. 그렇게 보자니까, 둘이 서로 아주 근접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읽으면, 또 달라진다. 뭔가 여름 볕이 신기한 어느 벌판에서, 삼국사기가 삼국유사와 겨뤄 점수 따고 가는 형세이다. 삼국유사는 상처를 입고, 온달 설화의 평강공주처럼 한없이 눈물 흘린다. 그것의 전면으로의 포개짐...... 삼국사기는 사다함의 설화가 강성하다. 온달 설화도 따지고 보면, 사다함의 별 생각 없는 연작이다. 그것을 읽다가, 내가 사는 나라의 고대 표현적 이질감에 뒤로 넘어질 뻔 했었다. 그냥 눈물이 한없이 나오고. 그런데 지금 보면 그와 같은 문왕의 주소는 무왕의 실제가 될 때까지, 수천년 동안도 참고 기다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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