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아렌트 이야기: 아무런 군사도 필요 없는 감각의 자연 상태
이런저런 책들을 지금도 읽고 있지만, 어제 읽었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빙거? 하나는 자끄 라깡 입문, 다른 하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다른 한길로로로 책이다. 내 몸이 검강해졌는지, 상대의 불쌍함이 보인다. 장수끼리 겨루는데, 일합도 못되는 것이면, 그 나라의 교육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자 부는 두번도 싸우지 않는 것이고, 모는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준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태초도 모르고, 낮게 나는 새가 전북 익산의 익룡 같다는 로고스도 모른다. 키도 작고, 악기를 말에 붙이고 있고, 자기는 세계관이 있고, 병증도 있다고 한다. 그같은 양명은 거짓일까? 아니면 우리가 찬송가로서 부르는 슬픔의 요단강 같은 것일까? 요르단. 벌판에 모여 섰고, 우리는 오합지졸 같아도 철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고, 그것은 성실, 적들은 박진감이 넘치지만 뒤는 별로 없는 세트들 같다. 먼저 장수들끼리 겨루는 것이 구경거리였다. 야훼의 발성적인, 의미적인 기원일 수도 있다. 싸울 수가 없었고, 나는 먹을 것을 주었다. 우리는 불만도 있었고, 이성도 있었다.
아렌트는 극도의 여장군 같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지만, 젊어서의 사진은 어제 처음 보았는데, 늙어서의 사진을 먼저 보아서 그럴 수 있다. 그녀는 라깡의 말로는, 인육으로 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로서 구조에 살고 있다. 로고스는 어지간한 로서 구조로는 뚫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 사람들은 건강해 보인다. 키는 크고, 머리 모양은 전형적인 문법주의자 같다. 한국 사람들의 비평적인 서문이 둘 다 이상적이었다. 아렌트의 경우는 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수였다. 잘썼다 못썼다 하기가 어려운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빙거?를 논하는 아렌트의 화용에 자기도 당할까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돈 크레머 같은 시니피에는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문법적인 차이의 예문에서일 것이다. 다른 데에서 보았다면, 콘트라스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보자니까, 아렌트의 예쁜 거울이 깨져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다중성, 프러랠러티, 그것을 강조한다면서, 마음으로 간음한 자도 간음한 인식론적인 케이스처럼, 문장의 진행 중에 사상은 커녕 기초적인 그래비티 마저 증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의 감각적인 감가상각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에이지 오브 이노슨스. 아렌트가 뉴욕에서 그것을 탐독하다가, 그와 같은 접점이 눈높이에 있다고 개미가 먹이를 날라 개미집에 옮긴 것처럼 예루살렘의 아이빙거를 썼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에이지 오브 이노슨스는 매우 훌륭한 문법을 가지고 있고, 뉴요커의 교양과 더듬이와 같은 생각과 조심 인간평들로 모퉁이 테이블 거실들이 지어져 있다. 플러렐러티가 아니다. 작가가 굉장히 강력하고, 작가는 여자이다. 무슨무슨 이던인가 하는데. 단순극치적으로 말하면, 아렌트는 새로운 권력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모든 방정식이 그러하듯, 프랭키를 쥐면 권력감과 비슷한 내면적인 반응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남의 시니피에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자면 그녀의 고도의 문명적인 여존재가 풍부한 양을 만나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말할 수 있다. 출판? 그것도 동네에서는 다만 동네 행사일 수 있다고. - 우리는 그와 같은 향유의 역광을 그리고 싶은지 모른다. 우유로 목욕하는 여인 같은. 사랑하는 자기만의 레비나스를 만나, 가사문학적으로 용인을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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