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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순창에서: 하나님의 질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by 마음대로다 2012. 11. 1.

순창에서: 하나님의 질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오늘은 유쾌한 날이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집에 작은 공사가 있고, 인부 아저씨들이 아침에 왔다. 인사도 나누고, 나는 바람이나 쐴 겸 나는 데이스타 아저씨로서 데이스타를 타고 나오려고 했다. 일하시던 아저씨는 화용의 얼굴을 하고는, 아주 좋은 오토바이라고 했다. 일본어로 하는 것 같았다. 혼모노 이데쓰요, 고노 오토바이. 나도 일본어로 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 자동차보다 비싼 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나는 궁금도 해서, 얼마짜리이냐고 했고, 아저씨는 천만원 가량 한다고 했다. 나는 우리 사는 나라가 좋았다.^^ 아니요. 그렇게 안비싸요. 아저씨 말을 맞는 말처럼 들을 수 있는 게, 데이스타가 예뻐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국산인데, 저렴하다고 했고, 아저씨는 대림 것이냐고 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모습으로는 천만원 가량을 하고, 씨씨로 보면 이삼백한다고 했다. 씨씨를 채우면 아저씨가 오해하는 오토바이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고, 기리적인 날씨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쓸쓸함의 초입에 나는 마음이 따뜻하여졌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은 스트릿파잇 알류겐~하겠지만, 모르는 사람도 요약이 본질이라는 차원에서, 앞으로는 어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대립구조에서, 따뜻함과 차가움은 어떻게 구분되겠는가? 사람들은 시니피에를 차가움으로, 시니피앙을 따뜻함으로 놓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반론과 오해는 사실 그릇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릇은 그릇 상점에서 찾고, 잘못은, 못과 망치는 철물점에서 찾고, 꼴두기는 어물전 망신?을 지금도 시키고 있는 현재. 시니피앙은 따뜻하고, 시니피에는 상대적으로 차갑다. 그러나 시니피앙은 오토바이를 살 수 없고, 오토바이를 탈 수 없으며, 오토바이 글쓰기라는 차원의 지평융합일 수 있는 시니피에를 할래야 할리데이비슨 할 수가 없다. 시니피에가 낫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증명받을 길이 없다. 그것의 환전소나, 익스체인지, 카프카의 구조주의 같은 증명소 같은 것이 없다. 다만 시니피앙끼리 오래될 수록, 시니피에가 있다는 소문만이 좋게 들리고, 그것의 클래식과 같은 집히는 것이 마치 사건 수사에 있어 해결의 실마리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셜록 홈즈의 글을 거의 읽지 못했고, 영어로 볼 때도, 문장이 좋다고만 했지, 단순 시니피에식으로, 시니피앙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이름. 셜록 홈즈. 아주 어떻게 보면, 피카소의 입체파, 아비뇽의 여인들, 신현균의 내 이름과도 비슷하게 보인다.

 

애뜨모스피어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이효리는 내게 순창 같은 데에 여행 다녀오라고 했었다. 그것은 도보 여행도 되고, 시간을 기다렸다가, 정답게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된다. 순창을 돌 때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말 안듣는 딸에게 순창 고추장으로 맛있게 비벼주는 밥을 먹이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오토바이 시니피에에 거의 처음부터 진입하게 된 내게, 순창은 너무 가까웠다. 거창. 창평. 합천. 평창. 남산 타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양명은 깊은 곳에서 정보와 비정보의 새로운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순창에서 커피도 마시고, 글도 써보리라 써보리라 했는데, 기회가 잡히지 않다가, 데이스타를 세차도 하고, 피씨방에 들렀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고, 역시 순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시 합성과 섭리는 하나님의 입체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질서는 메타피직스의 차원에서, 그렇게 높지 않은 하늘 아래, 오토바이를 타는 청년의 荀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여러 교회력을 지내다가, 오직 그것을 위해 다메니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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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요한 세바스찬 바하를 보고 듣다 보면, 우리는 현대 철학이 무엇이고, 미술사조에서 입체파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어째서 아프리카는 발전하지 못한 것일까? 크림 전쟁이란 것은 아이스크림 전쟁이었을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공부를 못하고, 안하고, 덜하고, 해도 잊어먹고, 엿바꿔먹고,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영원히 공부할 수 없는 사람들인가? 김동인의 붉은 산을 거대한 창으로 해서 던져도, 그것은 될 것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헤겔 철학과 연계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친구. 일본어로 도모다치. 셰익스피어는 언젠가 말한 것처럼 이태리 사람인데, 어려서 신부 수업을 받았고, 이태리 말의 본질처럼 명랑하였다가, 영국의 왕통인 것이 알려져 영국에서 공부도 하고, 생활도 하고, 문학의 꿈을 펼치게 되었다고 말이다.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독일에서 온, 체구가 건장하고, 때로는 센치멘탈하며, 두성으로 된 발성으로 독일가곡?들을 영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불렀던 헤겔이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빠지지도 말며, 플라톤이 넘치도록 한 것을 흉내내지도 말고, 아퀴나스를 공부하되 알 수 없는 말의 복지와 성채에 들어가 언제 죽은 지도 모르게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헤겔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럿이서, 워즈워드, 셀리 등과 함께 시황제의 고전을 두고 세미나를 했는데, 누가 누구인지, 한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인지, 헷갈린다고 해서 헷갈리스라고 그들은 불렀는데, 헷갈리스 대왕, 그것을 영어로 하면, 콘퓨셔스 더 그레이트가 되는 것이다. 가장 행복했고, 그래서 스톤헨지를 열 몇 명이서 도르레를 이용하는 기법으로 지은 것이다. 이 말을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것이, 본질과 구조주의, 역사라는 것은 다만 거창해서, 배워도 남의 배를 채우는 것 같은 언덕에서의 가시적 상태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떡을 먹고 지식에 용기가 생기고, 커피도 한 잔 나누면서, 몸에 따뜻한 피가 돌면, 그것이 성리학적인, 진리적 성채이지, 어디에서 얻어 맞고 왔다는 리얼리즘을 반드시 지어내고 반쯤 채우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닌 것이다. 서양은 다만 인문학적인 도만 있었고, 과학적 기술, 가난한 그들을 지지해주는 군대가 없어서, 지금까지 섬처럼 아주 좁게, 상상으로는 제주도 보다 못한, 독일인 마을, 프랑스 마을, 영어 마을, 스페인 별장, 그것의 추억, 그렇게 지냈던 것일까? 진리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초현대식 건물을, 기술을, 연인들을 더욱 뜨겁게 하는 정보통신을 여러 사상과 예술의 형태로서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파괴적인 제국주의 정복 전쟁으로 나아가고, 아프리카는 지금까지도 색깔론적 원죄의 가능성에 던져져 있다. 보라. 허리케인 샌디가 불어닥쳐서, 미국 동부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뭔지 모르게 진심으로 더러워서가 아닐까? 내가 주장한다면, 생각은 금방 저변이 되고, 해결이 없으며, 생의 에너지는 어느새 고갈되고 만다.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숱한 과학 수사 드라마. 엉? 숱한 아저씨 폭력 드라마. 아무런 제동도 없고, 골든 브레이크도 없는. 십년 넘도록 진행되어온, 짭잘한 직업 관계의 미시적인 자연들, 거시적인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면 조금 이상한데 수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