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2012): 기독교 장르회와 예수교 장르회, 그리고 호락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에 장르는 무엇인가? 장롱 면허 같은 것인가? 프랑스 배우 장 르노 같은 것인가? 장르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르 속, 이불 갠 모습의 절, 속절 없음이 아닌가? 우리는 절차탁마대기만성 기차를 타고, 오직 호락하여, 집의 가난한 경제 안에서 입센의 한국식 영화를 찍는 종착역을 향하는지 모른다. 교회는 건강하고, 경찰은 시간차 깡패 같다. 교회의 건강이 나의 불선과 같은가?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의 동양고전은 너무나 파편 같고, 청나라 철환은 독이 발라져 있어서 맞으면 죽지만, 일본의 철환은 다행히 독이 없어서 제거하고 치료하면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무슨 장르인가? CSI 같은 것인가? 경찰은 집에서 나와, 씨에스아이 찍고, 과학수사 찍고, 에프비아이, 국과수, 국정원, 공공칠스카이폴과 동일시 되는데, 우리는 염소에게 먹이면 잘 먹을 수 있는 종이와, 뜯겨진 종이와, 무엇이 쓰여있는지 궁금하지 않는 종이와 동일시가 된다. 경찰은 온천에도 두번 가고, 사복경찰이 아닌 데에서는 모든 사태와 혼돈, 분쟁과 갈등의 자리에서, 우뚝 서 있지만, 우리는 분쟁하고 있고, 어느새 싸우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있고, 어째서, 어째서 나는 싸우고 있는가? 불사조 스타일의 일본 만화 슬픈 눈물 자욱의 공각기동대 같은 자의식의 시니피앙이 뇌리를 스친다. 만일 영혼이 있다면, 기독교에는 장르회 장르가 개장르 같은 연장을 늘 눈감고 과시하지만, 위정자, 영혼은 교회로부터 피난하여서, 소돔과 고모라, 롯의 아내는 그래도 교회가 좋다고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대지 않은가? 나의 한신대는, 한신타이거즈, 일본의 고시엔의 야구공이 되는 것이다. 영혼. 혼다마저, 다다르지 못하는 그저 혼..... 뿔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는...... 여자의 인구는 중요치 않으나, 여자도 노동하고, 남자처럼 싸우고, 그러니 남자가 되어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염세적이고, 자기비하적이며, 하위권진학상담 같다. 아직 유목할 때, 신학교에서, 별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가도, 채플도 보고, 꾸역꾸역, 기적과 같이 신학 입문을 청강한다면, 그림을 새로 그리고, 솔거의 새들처럼 그리로 들어가, 그곳의 흙을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는 것이다. 신학생들은 기름으로 거만하고, 내 기름이 완전히 없으니까, 지들끼리 연예인들 웃고 떠드는 것 같다. 그리고 한신대는 자유가 있다. 술도 하고, 담배도 한다. 책들은 자기들 읽는 것을 동시동작적으로 읽는다. 수업시간에 발제를 하면, 동시동작적으로 똑똑함을 과시하고, 교수는 자기 아들과 딸들을 돌보는 것과 동시에 범주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내비친다. 어둠은 죽음과 같다. 어둠이 밀려 올 때, 우리는 고구려 왕의 차가운 석실분을 상상한다.
문학이 국문학이건 영문학이건 장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이해타산의 감정을 거리를 걷는 몇 걸음씩이나마 반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명하지 않은 한국인 학자의 것이든, 외국 것을 거의 그대로 옮겨와 다시 끓인 것이든, 다시 끓인 것까지도, 눈을 다시 뜨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빈한한 자의 그래도 지식 같을 수 있는 것이다. 대신에 힘이 없는 것은 사실이고, 외국이 기름과 양장본으로 지들끼리 재탕하는 것에 얇고 겨우 야교나 발라있는 것으로 종이들이 좁아져 있다. 햇빛이 들면, 가장 먼저 색깔이 바래지고, 가슴이 아프고, 아파오고, 첨성대에서 빨간 사과 하나 앞의 사각형으로 터져나오는 기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건 예수교건 장르들은 무엇을 기도하는 것일까? 늘 창세기를 오가는 것일까? 좀 사회적인 관심, 개인적인 교양을 쌓으려고 하면, 아들 딸 대학도 취직도 시키고, 결혼도, 집도 사는 것을 도와주면서, 드디어 교회 일도 하고, 장르들끼리 동남아 학교 만들기에도 참가하려 하는데, 아내가 세일즈맨의 비극이나 유리동물원을, 있는 것이면 어쩔 수 없으나, 하나님도 가정에 충실하라 십계명에 명하신 것처럼, 있지도 않는 것을 두고 싸움이 붙기 시작하면, 손찌검을...... 여자는 경험론적 지각으로 인해서, 정신에 큰 충격을 받고, 요양을 한답시고 비싼 집을 시골에서 구하고, 개를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장르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장르는, 대체, 다만 호락하는 것인가? 플라타너스에서 나뭇잎이 떨어질 때, 실지, 소리가 난다. 똑. 하고...... 장르들에게 공부가 없었던 것일까? 장르들에게, 젊은 시절 민주화 시위가 없었던 것일까? 장르들에게, 회사의 부하 직원에 대한 유사 목회적인 발언의 경험이 없었던 것일까? 예언은 말을 잘해서 예언이 아니고, 일을 잘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공항까지 마중 나가서 그 사람으로 또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의 만남에 있어, 예의를 다하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말로만 얼굴 가득 온 몸 가득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고 강요하는 것이다. 논어의 공야장은 얼마나 멀리 있는 발성이고, 누군가의 이름인가? 그 까마득한 날에, 한국 기독교의 전도사 이름일 수도 있다. 시황제는 기독교를 싫어했고, 싫어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공야장만큼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장르를 안다는 것은, 웃고 싶은 권리 같은 것이다. 성경은 장르가 따로 없다. 사람이 장르에만 일찍부터 적응한다면, 키가 왜소하고, 같은 장르인들끼리만 교우하려 할 것이다. 성경은 지구 끝까지 전도하는 여행력을 갖고 있는 문법이고, 내용이기 때문에, 무장르의 장르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장르를 파괴한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직업이 없을 수 있다. 뱀도 쫓고, 아담도 하와도 쫓아낸다. 다윗은 장막을 지었지, 장막 안에다 장롱을 놓지 않았다. 기적과 같이 사도 바울은 이전에 말을 탔고, 전도여행은 걸어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했다..... 요한계시록은 장르가 없다. 젊은 김유신은 그와 꼭같이 장르를 파괴하였다. 집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가 재밌으면 웃고, 슬프면 울 것이나, 하나님을 알고 나면, 경찰들이 비슷한 장르 없음처럼 있다가 요소 위에나 우뚝 서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교사들이 중언부언하는 것이 싫게 되어 있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래식과 미리암은 같은 말인가? 주희와 헤겔은 같은 사람인가? (0) | 2012.11.12 |
---|---|
꿈에, 인간은 운주사 나란히 누운 와불처럼...... (0) | 2012.11.10 |
우리는 상징 없이 살 수 없는 심볼리즘들인가? (0) | 2012.11.04 |
불쌍한 아렌트 이야기: 아무런 군사도 필요 없는 감각의 자연 상태 (0) | 2012.11.03 |
순창에서: 하나님의 질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0) | 2012.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