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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꿈에, 인간은 운주사 나란히 누운 와불처럼......

by 마음대로다 2012. 11. 10.

꿈은, 인간은 운주사 나란히 누운 와불처럼.......

 

 

 

 

 

 

 

 

 

청소년은 시치적인 발언일 수 있다. 이런 말은, 학교를 늘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으로만 아는 사람이나, 학교를 아주 물고문 전기고문 당하는 체액처럼 다닌 사람조차 자극하는 것이다. 시쳐라는 것. 혹은 사치라는 것. 시차. 얼마나 학생은, 부모의 닥달을 받으면서 시쳤던가? 다행히 안씻는 부모를 만나^^ 자식이 씻던지 안씻던지 학교를 다니던지 말던지, 상관하지 않던 서양의 귀족 같은 방만한 규모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산수도서관을 돌면서 옛날의 집들을 보면, 호남시장은 텅 비어 있으나, 부분부분 가동이 되고, 리베라 어린이 합창단의 서랍을 꺼내, 음악의 향을 뿌리면, 사람들은 꿈 속에서도 일을 하고, 사업을 벌이며, 새로운 가게를 열고,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비슷한 사람인지 쳐다보고 하는 것이다. 폭력이라면, 가로수의 키가 이것도 저것도 어마어마해졌다는 것이다. 티비에 바오밥 나무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중심으로, 한 명의 어린이 장군과 사람들로써 비쳐졌는데, 우리가 추위를 단속하고, 서로에게 예쁜 직접 그린 그림 엽서이던지 인터넷이던지 편지를 보낸다면, 그 두 공간은 굉장히 엇비슷해진다. 옛날에 송일국이 찾아간 나라도, 북아프리카던가? 아니 벌키스 파쏘 하던 나라던가?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는 일어서 있었는데, 조금씩 네 발로 기어다닌다고 했었다. 그래도 얼마나 사람 인을 구하려고 애를 쓰던지, 혼자만의 독백이, 그래서 문학에서의 정신병은 완전히 없는 것에 비하면 늘 언제나 수준이 높다는 것이, 찾아온 손님을 알아보았고, 뭐라고 말을 걸었으며, 송일국이 어둠 속에서도 먹을거리를 구해와 함께 먹으면서, 자기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프랑스어를 국어로 하는지 모르나, 좋다고, 너무나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 아주 어렸을 때 자주 걸었던 작은 골목이 있다. 계림국민학교로부터 철로를 만나, 백림약국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는데, 친구 한 명이 거기서 살기도 했고, 얼마나 자주다녔는지 모른다. 꿈은 대개 돈을 꾸는 것 같은지 모른다. 나는 그 거리들로부터 많은 꿈을 꾸었다. 사람살이가 어려워도, 가게를 여는 꿈, 가끔은 술집이 있어서 나뭇젓가락을 부러뜨려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꿈, 나도 그렇지만 아침밥을 먹고 일찍 학교에 가는 꿈. 교회에 가는 꿈. 학교 파하고, 집에 가는 꿈. 체력이 동반되면, 우리는 그것이 꿈인지 생신지 잘 모른다.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어린시절의 꿈을 지나, 전람회의 그림처럼, 클래식과 명화들로, 아름다운 찬송과 설교와 설법들로, 그러다가 아픈 병동을 도는 찬송 모임으로 앙가주망할 때였다. 청소년은 잘 씻기 시작한다. 아마도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도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블록을 넓혀갔다. 그래서 기억은 혼합되고, 리플레이스먼트, 전치되고, 욕망은 메타포와 같아진다. 중학교 성적을 년 말에 한 전교 십사등 정도 만든 뒤에, 열두반이 있는 데에서, 교회를 가는 그 작은 길을 거쳐, 교회를 한번 들렀다가, 시내의 영화관에 갈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현대 문명은 홍콩 영화 같아서, 기호와 배우의 얼굴에서 인접성이 차고 넘쳤다. 어쩌면 내가 홍콩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소화자나, 취권, 용쟁호투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피를 흘리고 또 흘려도 아무도 그것을 탓하거나, 뭐라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나, 내가 가는 길의 대상이 깨끗한 폴리스 스토리 같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주소를 두고 있고, 한국에서 늘 기독교적인 죄에 찬송을 부르는 폴리탄들은 가케무샤 같아지고, 도케티즘 같아졌다. 그것은 옛날에? 내가 궁예가 자기 아내의 음부를 인두로 찌르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문학적 전체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어렵고, 여자들은 부분균질로부터 영영토록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기 때문에, 국가의 이름을 그렇게 아름답게 짓는 언더월드의 인간이 느닷없이 참혹한 일을 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게, 작가가 조성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궁예가 아내와 함께 말을 타고 언덕을 오르는 것을 또한 리베라 소년 합창단의 배경으로 그릴 만 하다고 했었다. 처음이 사실이라면, 후자는 비사실이며, 후자가 사실이라면 전자는 거짓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무슨 모순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홍콩 영화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 모두가 내게 반환되었다. 청소년이, 시치적인 존재 차원일지라도, 교회에 다니고, 차분하며, 늘 친구들과 리를 나누고, 공부를 그 한 없는 고독의 순간에도 잘하여간다면, 피를 흘리는 것이 대수롭지 않는 홍콩도 영화도 그처럼 변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청소년과 문명은, 비문명과 플라톤의 관계의 본체이자 그림자이다.

 

말을 타고 언덕에 오르면, 나는 다시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서류적인 측면에서 결혼도 했다가 헤어질 수 있고, 말로만 결혼을 했다가 헤어질 수 있다. 그것은 국도. 그것은 무슨. 어떤. 삼성라이온즈인가? 삼성라이온즈가 학교 같은 것인가? 언덕을 비켜가면서, 대학교 옆에 버스가 섰는데, 학생들이 타고, 일반인들은 갑자기 리베라 소년 합창단이 들어찬다. 그것은 다만 평생 비켜가기만 한 사람도 그러하고, 영문학과와 국문학과를 나온 사람이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나 붙잡고 선생님 잘 계시냐 묻고 싶은...... 학생더러 나오라고 해놓고, 길가에 묻고 싶은....... 그 형상적인 단순 백제.......

 

 

 

 

 

꿈에, 내 씨비육백에프 앞 타이어가 조금 마모된 것을 두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국산으로 바꾸고자 했고, 그 사람은 그래도 품질이 좀더 나으면 지금 타고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했다. 근래에 꾼 꿈 중에, 가장 인간답고, 평범하며, 내게 잘 맞는 꿈 같다. 질주하다 보면, 그 넓은 중국에 오토바이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꿈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자기만족적인 반복인가? 아니면 수업교과목 같은 반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