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은 어떤 사람이 보며, 볼 수 밖에 없으며, 보고서 무비좀비가 되는가? 사회학에 관하여
에이도스는 그렇게 어린이 돌잔치로 말을 많이 했으면서, 어째서 대학 진학에 관한 고등학생들은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이 의아해 할 수 있다. 그것은 코스모폴리탄. 우리의 생활 저변에 걸쳐서는 대단히 생경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밖에서 청해진 장보고 돌아오는 길 말고, 왠지 모르게 한자 학원의 합성과, 피아노 학원의 여러 수상 현수막, 미술학원, 미술은 진심이니까, 꽃집, 들리는 말에 의하면 등단한 시인이라는 사람이 담이 없는 주공아파트 언덕을 넘어 집을 가는 백제의 어사화는 사람들의 부지불식 중에 생각의 고고학을 강요하며, 고등학교 내 친구가 서울대 고고미술학과를 가고 싶어했던 것처럼, 돌잔치와 대학 진학과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해 보는, 비극적인 세계관적인 응시로서의 티타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이 많은 장년에서부터, 장년이란 나이가 많다는 단순 뜻이니까, 장로교는 단순히 나이 많은 장로들의 교회라는 뜻, 그것의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아무 것도 없는 볼링장의 구석, 최후, 드르랑트랑, 한참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그리고 시간의 정확자로서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까지도 가질 만한 것이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과학 계통의 이과 지망은 다만 사회복지학tee라고. 그 어마어마한 인구와 계통이 젠부 그러하다. 문과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국문학과의 제논들이다. 그러니까 두뇌에게는 두뇌를 망칠 수 있는 재산을 없앤 것의 구도가 잡히는 것이다. 김윤식이 다른 많은 지식들을 논문에서 설하기 좋아하는 것도, 뭔가 알듯말듯한 대상이기 때문이고, 드디어 우리는 백미터 달리기의 모습처럼 그것의 처음과 도착하는 것, 저마다의 기록들과 그것의 의미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돈을 벌고, 고기 먹고, 비싼 옷 입고, 좋은 차, 좋은 집 타고 입는 것은 극히 일부의 시간일 뿐,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연구소에서 식음을 전폐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이, 문학 아닌 사람들에게 보다 많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하고 뭐할 건데?
한국 소설 중에 거위와 폭소라고 있다. 거위라도 하고 싶은 마음.......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동양학의 저변에서는 천년오리라는 암호로서 통용되는 화폐이다.
세계를 보고, 단어를 찾고, 사찰 탐방, 시문학 탐방 같은 것을 해보려고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국문학과나 예술 계통의 학과를 가지? 티비에는 그런 사람들이 오분대기조처럼 늘 출동하지만, 사람들의 싸늘한 일인일직의 세계관에서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티비가 사람들의 그와 같은 가능성을 허위로써 잡아먹은 것일까? 아니면, 영영히 그와 같은 가능성의 오리조차 오리도 가지 못하는 인간의 영원한 감옥과 능력처럼,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에 티비 탓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국문학에서 실사구시의 눈을 떠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빛 중에 빛, 서울의 달이다. 이공계를 나와서, 문학모임에 나가 한국 명시들을 읽고 토론하는 사람은 인사동 쌈지 센터를 돌아다니는 외국인 같다. 국문학과 사람들은 늘 태극에 시달린다. 비극의 행정 기관을 알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는, 금홍이는 그래도 이상의 편을 들 줄 안다. 소설가 구보씨가 달려와 반기는 아이들에게 수박을 선물하고, 그것은 행복한 동일시, 카나라즈,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빈한한 문학인의 테이블에 찾아온 아주머니에게 영원히 낮은 말을 예시할 때, 그것의 낯설게 하기와, 시쓰기, 도저히 평론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문학적 시크함을 자랑하지도 못하고 모른 척 하지도 못하는, 피라미드의 모퉁이 돌에 일찌감치 노출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사회복지학티들은 도저히 비씨씨튜드가 있을 수 없다. 언젠가 말했지 않은가? 미생물공학과를 지능적으로 배우고 합일한 사람은, 사랑과 연애마저도 미생물을 실험기구에 심고, 배양하고, 관찰하고, 보고서 작성하고 하는 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것의 적용이 쉬운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괜찮은 영농작법에도 사람들이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은, 사회복지학티들이 갖는, 고무장갑의 손가락 속으로 겹쳐짐으로부터 한번도 기쁨의 공기를 불어내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는 무한한 노동의 구멍이다. 다만 밝다고 해서 양구이다. 내가 갔을 때는 대학 재학생 위주의 인원이었다. 그래서 저녁 시간에는, 리베라 소년합창단의 음악처럼, 책을 책을 그렇게 읽었다. 쉬면서 티비보고, 바둑이나 장기 두고, 외박 나가 양념 통닭 먹고, 술 먹고, 자동차를 탈 때는 할 줄 아는 말이 클락숀 밖에 없으면서, 조금은 학생처럼 서로들 수다를 떨고 노가리를 깐다. 추우면 리얼리즘. 여자 이야기들을 염세주의나 원소주의 소재주의식으로 행한다. 여자를 두들겨 팼다는 말이나, 두 여자와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이 얼마나 시황제의 업적인가? 믿음도 없고, 문학도도 아니며, 다만 전국에 무수하게 솟아나고 다시 뿌려지는 사회복지학티들이면서. 이렇게 어마어한 공중의 거북선을 두고, 다시금 내가 청테이프를 붙이자면, 그나마 그들이 영혼의 문학과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지각과 반응, 순간적인 책장과 종이학과의 동일시가, 문학 지망의 친구를 그림이나 티비처럼 갖고 있는, 선배들의 피와 호락 밖에 없어도 도학가들이 있었기에, 여자 이야기는 그나마 한번 자는 식으로 포근하고 듣기에 영원히 아름다운 것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좀 더 나아가는 소재주의가 있었대도. 그리고 태공조에 따르면, 여자들이 예쁜 얼굴에 천박한 것은, 남자들이 권력과 체력, 산과 같은 활동 영역을 갖고 포악하기 때문일 수 있다. 포악은 포악으로 상대하는 수 밖에는 정의가 환수될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들조차, 영화는 거의 절대적으로, 절대의 남녀 사회복지학티들의 굼실대는, 무분별한, 지역을 알 수 없는 지각 아래 감추어진 어마어마한 더러움 때문에, 그것을 표상하고 자개농으로서 필름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학은 누가 하는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문학인가? 아니면 그나마 사회복지학티들의 자의식인가?
함께 기도하자.......
스님들도,
경찰들도.......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정식 같은 신사임당, 현대시 여러 생각들. 이태동의 한국 현대시 (0) | 2012.11.15 |
---|---|
혼다 여러 신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0) | 2012.11.13 |
클래식과 미리암은 같은 말인가? 주희와 헤겔은 같은 사람인가? (0) | 2012.11.12 |
꿈에, 인간은 운주사 나란히 누운 와불처럼...... (0) | 2012.11.10 |
늑대소년(2012): 기독교 장르회와 예수교 장르회, 그리고 호락이란 무엇인가? (0) | 2012.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