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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혼다 여러 신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by 마음대로다 2012. 11. 13.

혼다 여러 신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앨범을 보면서 신보신보 한다. 그렇다고 구보를 구입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오직 앨범과 신보가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옛날의 이문세와 변진섭의 독재를 기억한다. 이문세가 가격을 올렸다. 내 교회 친구가 구입하면서 투덜투덜 대던 것이 어제의 내 친구 얼굴 같다. 청소년의 시치에 가장 접근하는 것이, 난 너를 사랑하네가 아닐까 한다. 겨우 엑시브를 생각할 수 있는 때에, 보다 오래 전의 모델이었는지, 이문세의 그 대목은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함께 달리는 코난과 포비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 그것은 나의 가장 최고 존재. 비커밍.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돈호법. 피와 같은 돈을 벌어서, 친구와 바베큐 파티를 하는 지옥 홍길동으로 마지막 에이도스를 기약하는 것. 그때의 민주화 운동에는 이문세가 기여한 것도 상당했다. 변진섭의 사랑노래도, 청바지가 잘 어울려서, 민주 투쟁의 한 길로 나가기도 했었다. 나간다는 선두. 나가지 않고, 응원하면서 공부한다는 차두. 오직 최고의 일과 이로서만 이뤄졌던 캠퍼스. 지하철역은 말 그대로 은하철도 구구구 같이, 청년 영화의 산실 홍콩 영화 역도 있고, 최진실, 김용옥, 문익환 역도 있었다. 그것들은 먹으면 피곤을 동반하는 것이었지만, 존재는 뭐 쏘세진가? 검역한 국어연구위원회의 영원히 대답 없는 너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는데, 그런 선두의 것들은 거론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하지도, 자판을 두드리기 거북살스럽지도 않다. 아나운서는 욕하지 않기. 아나운서는 언어운사.

 

사람들은 씨비사백을 기억한다. 지금도 눈에 보면서 오보에떼구레? 한다. 리베라 소년합창단도 씨비사백을 타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마치 그것은 혼다 씨비가 세상을 모두 통일시킨 것 같은 느낌도 되었다. 오토바이는 비가 오던지, 날이 밝던지, 세련된 리의 신사가 타던지, 여성 라이더가 멋진 가죽 자켓을 입고 타던지, 반드시 한정이 되지만 영원히 반복해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 있다. 그것의 아스라함. 충북 의림지에서의 아지랑이. 아브라함은 실존인물인가 하는 늘 새로운 신학서적들. 그의 학자적 탐구를 욕하지 않기. 아나운서는 언어운사. 사람들은, 중년의 떼꾸레들은, 포장마차에서, 와따시노 와따시노 혼또니 씨비사백오 호시이 했스무니다 한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그것은 몇 편의 기라성 같은 이와이슌지의 연작으로 표명되었었다. 어째서 일본 오토바이는 모델이 퇴보할 수도 있는가? 그것은 홀로 있다는 증거이고, 부끄러움이 많다는 정보이다. 씨비사백은 불이 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직관적인 스캔들 파헤치기나 사소설적인 넋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렇다면 다른 어마어마한 오토바이 회사는 어떠한가? 거의 모든 오토바이는 리베라 씨비사백을 따라하고, 모방하며, 히치하이킹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그 이전의 모델은 어떠했는지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이다. 그러니까 이런 혁명이 있는 것이다. 흉내만 잔득 허용하고는, 스스로도 퇴보하는. 씨비천삼백은 리베라 소년합창단이 베토벤의 구번 합창을 부르는 케이스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생각과 패션을 보면서 따라하거나 조절하는 것. 때로는 반대하는 것. 반대할 때는 그냥 부피를 만들거나, 뒤를 짧게 하거나, 휠의 디자인을 바꾸는 것. 한국의 효성이 코멧을 내세운 것도, 추운 겨울 날, 마치 초가집까지 도달하여서, 인종과 신분, 국적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서 친구의 이름을 부를 것 같은, 그래서 그것의 인구가 어마어마했던 씨비사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씨비사백을 알지 못했고, 예술을 모르던 청년들이 자기의 모든 돈을 꼴아박아가면서 사랑하였다. 그것의 영남대학교. 단국대학교. 서울의 퀵아저씨. 그들은 대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연비가 높지만, 씨비를 탔던 것은, 리베라 소년합창단의 유사 학교성 때문이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여학생을 사랑하고 있는 듯한 느낌. 괜시리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의 씨비육백에프를 보면, 어디를 다니는 여자인지 잘 모르겠다. 굉장히 행복하고, 나의 나라는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도로 위에 한 평도 안되는 곳에 있는 것 같다.

 

혼다의 여러 신보들은 스스로 생각한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혼다의 디자인팀의 초라함과도 명실상부한다. 그것의 참 코스모폴리탄이 빗겨보인다고나 할까? 내 친구 산케이는 머리를 가끔 오대오로 하는데, 그것이 어느 때는 진지하다는 것이다. 나는 화도 나지 않고, 어째서 그렇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대오였을 것 같다는 것이다. 프로 디자이너가 아닌 것 같다. 그와 같은 아마추어리즘은, 지자기 삶의 증거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나, 동경 모터쇼에서도 기계장치의 하나님과 조명으로부터 물러설 것 같은 훈고주의인 것이다. 일본의 열도병이기도 하다. 삼각형을 만들어, 카드를 프로 주술사처럼 원으로 금세 만드는데, 실패하여서, 몇 개의 삼각형이 막을 수 없는 친구의 출정에 함께 하는 느낌이 있다. 대학이 있고, 철학과가 있고, 쏟아 붓는 후원을 한다고 해도 철학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하늘로부터 선물 받은 것 같은 균형과 배치, 통합민주당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도, 설명에서부터 우리는 자신이 없고,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원래 정신의 주변국가이고, 아시아나 항공이고, 뭐 이런저런 변명과 수사는 죽은 사람들까지도 인구 조사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대개, 일반성과 주관주의의 대결에서 지속적으로 실패한 다음에, 기본도 회복하지 못하는 형상으로서의 이념 때문이다. 몸을 파는 여급의 세계관과, 상상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작가적인 신파의 규제만이 아니다. 단어의 정의, 사전과 사전 조사 같은 작업을 철저하게 해도, 바닷가에 나가면 회를 먹고, 배가 고프고, 슬프고, 그와 같은 주관 상태에서 음악을 단순하게 반복하여도 주변의 착한 사람들은 금세 박수를 쳐주기 때문이다. 종말은 혼다. 그나마 세계성의 척도를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이 불을 켜고 저녁 바다 소리를 듣고 있는데, 우리나라 시인의 성탄제가 생각나는 것이다. 성탄제는, 한 국가의 국어시, 내부시, 내부 유명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단순한 병렬이기통이, 물결도 이고, 달도 떠 있는 곳을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가? 내선일체? 단 두 국가만 있어도, 국제라는 말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혼다의 이번 신보는, 실제적인, 실체적인 국제주의로서의 혼다의 디자인이 조금 앞날의 야수파적인 기질과, 갑작스러운 고전주의의 만남에서, 한껏 부풀었고, 기쁨에 차올랐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참으로 묘한, 우리나라 시인의 성탄제 같은 에클레티즘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난다요? 난다요, 고래. 붉은 색의 씨비오백알은 환상이다. 그러나 자기 허벅지를 잘라, 팔아, 구하고 싶은 행위의 광증은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그럴 것 같은 상상의 주도권은 넘겨주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