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 교수의 우리에게 유학은 무엇인가? : 지극한 낭만성으로서의 인간에 관한 탐구
박정은의 리베라탱고를 듣는다. 신보이다. 나는 나를 반성한다. 사도 바울이 그 많은 양의 반성문을 작성한 것도, 잘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양반의 대청마루 기둥에 날아든 화살 쪽지이다. 속삭이던 두 봉건주의자들은 가슴이 떨리고, 언 놈이냐? 외친다. 그것은 그들 세도의 무의식적인 에이도스. 죽지 않는 것은 두 가지 방향. 공격자의 마음이 유순한 것이고, 다만 심부름의 방식이 그러할 뿐이라는, 다른 하나는 같은 공간 같은 계절의 시간 속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트릭 같은 것. 디아볼리컬 히스토리시즘 같은. 아무튼 쪽지를 펴 보는데, 사도 바울이 잘생겼다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데, 그들이 특히,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항목으로서의 지식인 것이다. 그것은 김태희는 예쁘다는 말과 비슷하다. 안예쁠 수 있다. 조명과, 인상을 찡그릴 때. 다른 대항마를 끌고 와서 집단적인 의지를 보일 때. 일본 보수파 집단이 확성기를 들고, 김태희는 물러가라 시위를 벌일 때. 내가 김태희의 항우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면, 민본주의적인 양혜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태희는 안예쁘더라도, 그들은 많이 추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전철을 갈아타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그래도 김태희는 예쁘다고 속삭이는 양혜왕들이 될런지 어떻게 아는가? 모든 것은 조작과 같고, 양심과 미학, 판단의 코스모폴리탄 단위시간적인 국민투표 같다. 사도 바울은 잘생겼다는 말. 그것은 그 무엇에 대한 탱자인가?
나는 로서 구조를 갖고, 나를 반성한다. 내가 이토록 무등도서관을 사랑하였다면, 진작부터 다닐 일이지. 그렇다. 김태희 같은 무등도서관을 어째서 이제서야 다닌 것일까? 그것은, 나의 집이 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의 집에서는 무등산이 보이고, 집 앞에는 공원이 있다. 책을 보다가 티비를 볼 수도 있고, 어제처럼 맥주도 마실 수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천개번둥이 치는 날에는 시끄럽고, 좌충우돌, 좌충효동 우이명박하지만, 참으면, 그 순간만, 그 날만 참으면, 해가 뜨고, 추운 겨울날만 참으면 봄이 찾아온다. 봄이 찾아오면, 어머니와 함께 양혜왕이 복지시민사회의 장관이 되어서, 햇빛 무료 쿠폰을 나눠주고 다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도 아들이 벌이가 없으면, 하나님의 좋은 점을 무조건 찾으려 하기 때문에, 매우 좋아하신다.
배병삼 교수의 우리에게 유학은 무엇인가? 하는 책은 부르스타 같은 번뇌가 있다. 사람이 우주속에서는, 이름의 인연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한 길인데, 약간 늦추하더라도, 하나는 배삼룡이고, 하나는 김영삼이다. 한분은 작고하셨고, 한분은 아직 살아있다. 나의 문장작법은 무엇인가? 종말의 마지막 터미널에서, 사람들이 자기만의 에이도스를 만져도 되는 죽음과 자유의 시간에, 그나마 일본 무도가의 클리쉐처럼, 민주주의라는 현판으로서의 정명론, 현판은 얼마나 아름다운 소재주의인가? 그렇지 않은가? 나무판, 그것은 거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글씨, 붓으로 쓰고 금방 옷칠을 한 것인지, 판각을 해서 글자부분에만 다시 검게 칠한 것인지, 그것만큼 햇빛 쏟아지는 나날이 없다. 그 귀한 것을 경공술로 날아 잡아채고는, 민주주의를 파기한다는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론적 측면에서, 지배인이나 지배자더러 나오라고, 나니꼬레, 응, 나니꼬레, 이럇사이마세 외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두려워 웃고. 무슨 뜻인지 화용론적으로 알아듣는다. 희극과 비극이 전칭명제놀이가 되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외격과 엿보이는 체력, 경공술의 증거로서의 한쪽 손에 들고 있는 현판 때문이다. 지배자는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고, 지금까지 일본은 안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국 옆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것이 매우 미약한 신호로써만 유지된다고 하는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겨울 수도 있고, 수학적인 파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상성은, 에이도스의 종말론적 터미널의 풍경과 등치의 것으로서, 없는 것에 비하면 제논의 날지 않는 화살의 신분이다 할 만 하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한국을 다시 본다. 배삼룡과 김영삼. 한 사람은 신동아이고, 한 사람은 주간조선인가? 손을 들어 확인해보자. 기자들은, 손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기자제와 외면의 첨단, 화려함과 남들이 우러러봄과 대비적으로, 자의식적인 흑백사진 하나 없이, 허구한 날 한강이 얼고, 주민들이 전경과 싸우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축제를 하고 하는 사진만 찍어대는 기자 전체의 집단 의식이기도 하다. 과연 배삼룡만한 사람이 있는가? 추울 때, 민주주의적 피식민지인들이 곁불을 쬐는. 거대한 드럼통 같은. 관념의 활로. 서영춘. 영구야 학교 가자. 그리고 김영삼 같은 사람이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현실관계적인 뜻이 담긴다 하겠다. 배병삼 교수의 인트루젼으로 보면, 지역적 우선권을 인정해서, 그쪽으로다 이런저런 쿠폰을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건축의, 무슨 형태인지는 모르나, 저작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의 앙드레 가뇽과도 일치한다. 가장 많이 일치하며, 내가 언젠가 한신대 유봉학 교수를 나의 제자라고 부른 것처럼, 가장 제자로서의 혜안이 엿보인다. 우리는 논문을 상대할 때, 어쩔 수 없이, 국회도서관, 모든 단어와 관념들을 알 것처럼 말한다. 그것은 일본 유명 드라마의 제목 같은 트릭이다. 일단 주관으로서의 위대한 糖사자가 아니다. 같은 에너지로 읽는 사람은, 다른 당을 온 몸에 두르고 있는 사람이다. 알 수 없고, 빈공간을 지나, 심지어는 친하지도 않는 사람의 가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박사모를 쓰고, 우리집 근처에 많은 예쁘고 통통한 박사새가 된다. 그것의 연대는 구름과 같고, 벽돌 하나가 플롯처럼 빠지면 전체 스토리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정치학과는 무엇인가? 그의 맹자 논문 첫번째가 마음을 여간 슬프게 한 것이 아니다. 전쟁과 시위, 가난과 경제 발전은 얼마나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가? 빈자와 양자에게 먼저 주어야 하는 쿠폰은 또한 얼마나 기계적으로라도 남발할 수 밖에 없는가? 나의 문장 철학은, 암암리에 이와 같았다. 집중하지 못할 바에는, 단어를 버리더라도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낫고, 웃음이라는 가장 좋은 당을 취하는 것이 좋고, 기조를 유지한다면 음악적으로 도리어 즉흥적이고 환상적일 수 있다는. 다만 배삼룡과 김영삼 교수의 정치철학 논문처럼, 그저 흘러가는 대로 기술할 뿐인데도, 우리는 어아어마한 압력으로 인해, 중국에 단 하나의 왕만이 착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는 시니피에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정식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다. 테크네. 월간조선 사진 기자가 나란히 곁불을 쬐다가, 회사로 돌아왔는데, 누구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하늘로부터 논문과 글자가 흩뿌려지는 방식이다. 아무튼 서로 좋아하고, 축하하고, 그러나 누군가는 트릭에 빠져 다시금 새롭게 동양을 멸시할 수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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