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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방정식 같은 신사임당, 현대시 여러 생각들. 이태동의 한국 현대시

by 마음대로다 2012. 11. 15.

방정식 같은 신사임당, 현대시 여러 생각들. 이태동의 한국 현대시

 

 

 

 

 

 

 

 

 

우리는 생각한다. 책 읽으면 까불기 좋아하고, 이성을 만나면 지적인 방담을 나누기 좋아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의사들은 김장 김치 같은 환자들만 돌보며, 전체적으로 보면 그다지 의사롭지 않다. 의사소통행위이론. 하버마스와 하마스들 같다. 히포포타무스. 의사들은 자기들에게 밀어닥치는 그와 같은 물자체를 두려워하며, 노아의 방주처럼 논어의 리인 장에 어떻게든지 입회하려고 한다. 그러나 손에 피를 묻히는 터부. 세리도 전문 관료의 근거이고, 바리새도 학자와 제도의 부족함도 모자람도 시방삼세 얼룩도 없는 자이나, 절대 권력자가 아주 모세가 던져 깨진 십계명의 석판 돌조각을 들어 다시 던질 것 같은 피사오리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극치. 유둔하고, 순명하며, 좀체 화를 내지 않고, 싸운 적이 없는 법조개 출신 대법관이 멱살을 잡고, 지금까지 점심과 저녁으로 거나하게 먹었던 모든 동탁 고기들의 힘을 동원해서, 상대방의 와이셔츠를 잡고, 자기 양복의 어깨가 찢겨지는 것도 모른 채 성화 혹은 성불하고 있는 지경. 그것은 순수함이다. 순수이성비판. 우리의 드라마와 연극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집필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전문지식,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공간, 틈만 엿보이면 반말할 것 같은 누런 빛이, 여간 관심을 갖기도, 자기의 영혼을 나가게 해서 대리 집필하게끔 할 만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태동의 한국 현대시의 여러 비평문들은, 제법무아, 아름답다. 제법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옷깃이 여며지고, 그냥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내 필력에 무릎 만큼도 차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과의 혼융화법, 깨물어서 안 아픈 발가락이 없대지 않은가? 백제의 보이지 않는 자연 빛 아래서, 학교는 거기에 낑겨 있는, 책을 보고 우리는 책상에서 발을 먼저 내미는가? 아니면 팔을 들어 양파막 같은 얇은 비닐을 벗겨내는가? 이태동은 잔잔한 물결을 모두 모았고, 그것이 행여 중복이 될까 노심초사한다. 나는 서강대 거동도 불편하신 그 노교수가 아닌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인터넷 검색했더니, 그분은 이과 교수님이시더라. 이 에피소드. 웃기지 않는. 상점 하나 같은. 존재와 비존재의 만리장성. 그 거동도 불편하신 노교수가 쓴 글이, 이런저런 글들의 모음도 좋다지만, 수미상응을 염두에 둔 완간본이라는 느낌이 있다. 어제는 서정주와 아무개를 읽었고, 오늘은 처음부터 보았는데, 레이디 칼리프 같은 무등도서관, 이게 너무 상찬인지, 국적 불명의 향수인지, 나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필사적으로 재미를 확보하였다. 그와 같은 핼멧. 그와 같은 홈런 타구의 반대방향적인 상상. 처음부터, 이상화까지. 그것은 충격이었다........ 내 나이 마흔. 니체의 권력 의지. 이런 말에 불필요한 반응이 가능한 엘리트들이 있는지.

 

좁쌀 같은 외국어. 홍콩 반환.......

 

그것도 무간도2를 보아야 죽간될 수 있는........

 

 

 

 

그때까지의 모든 비주체적인 깡패 신사는, 홍콩 반환과 불꽃놀이로서 사라지는 것이다. 누가 주체가 아니되고 싶어서 아니되었는가? 마치 사람이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부모의 지능과 재산이 필요하다는 저주와 한이 섞인 운명론처럼. 그것의 농촌 도시 같은 배경 말고는 모두 총기난사 하고 싶은 제거심....... 우리는 그와 같은 영화도 보고 싶은 것이다. 허구한 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영혼의 상업 영웅들을 지켜보아야 득될 것이 무엇인가? 대신에, 시인은 홍콩 반환 같아서, 다만 용맹무쌍한 영화의 한 장면 만도 등장하면 예수님과 같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태동은 여우처럼 그것을 김소월의 초혼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째서 불가능한가? 우리의 무의식은, 루카치 인용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역사의 구조와 관계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았던 홍콩. 그러다가 백벌의 옷과, 간장 한 종지의 반찬이라는 댓구를 만나고, 우리 일제시대 소설의 어느 부분과 비슷하게, 지속 가능한 세계처럼, 그것은 어느새 일리가 있는 인간의 능력이 된 것이다. 홍콩 반환과 인간의 크기 같은 것은 가혹한 것이다. 그것은 괴석과 같고, 주장자의 영혼을 혼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