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설과 영화만들기라는 책을 아리스메띡스 라이브러리에서 읽고......
어떤 한국 사람의 그렇게 깊은 땅의 갈기는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느낌 상으로는 이문열이나 다른 사람 정도, 아무렇게나 절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김원일 마음의 감옥 안에서, 이것을, 이런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고, 잘 몰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늘 신비로움을 느낀다, 애니웨이, 문장을 다시 덧입고 글을 진행하자면, 내가 너무 건성이어서, 최대한 적확함을 시도한, 들뢰즈, 그리고 슬라보지첵, 이진경, 인용들의 진행 안에서, 비슷한 태도와 자세를 갖추지 못한 것에 못내 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목사의 설교를 잘 듣지 않아도, 교의학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서울의 전선이다. 서울의 달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집에 포르쉐가 있는 사람이, 친구가 제네시스 쿠페를 샀다고 해서 눈깔이 빠질 정도의 선망을 느끼겠는가?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한국차에 대한 노스탤지아. 때로는 알 수 없는 노동 투쟁 안에서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정도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집에 포르쉐가 있다는, 그것도 최신의 것을 갖고 있다는, 자기 사실을 망각하고, 그의 사회적 진출을, 거라지와 함께 축하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렵다. 유리성과 같은 첨단의 문명이 순식간에 액박이 될까봐. 그래서 그것의 흥분과 오르가즘을 못내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물질은,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윤선도. 고산. 윤두서. 해남 윤씨. 기쁨도 슬픔도 없고, 앞 물질이 있고, 적당한 뇌질을 인정 받으면, 뒷 물질이 따른다. 우리는 고등하다. 고등어를 자주 먹는다. 그러나 서울에서 살면,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속물부르주아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한 것인가 자문하게 된다. 방송국에서나, 그것의 높은 성채, 티비에스가 죽었다가 에스비에스로 부활한, 나는 잘 모르는, 아무튼 토요일 날에, 점심 외화로부터 시작해서, 주말 연속극,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까지의 당나라 장안과 같은 풍성함으로써, 적에게 잠식 당한 식민지 세계 안에서, 알 수 없는 태극권적인, 출문으로 입문하고, 입문으로 출문하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선사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제법 캡슐처럼 단단해서, 세상이 이어도 비참하다는, 그리고 석화촌 더 비참하다는, 제목을 알지 못하는 이청준 모또모또 더 비참하다는 그런 이야기는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이어도는 지금에서야 그것의 내러티브를 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식의 하양평준도 안되는 슬픔의 무한궤도 같은 낭만주의는 아주 질색해 한다. 나는 거기서 그냥 여자가 평화의 비둘기처럼 젓가슴을 내었다가, 남자가 다음 캇툰으로 바다에 죽으러 가는 것이나 상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맞는 내용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하소연할 데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표절이고, 인간은 신대루, 모두 죽는다는 격언의 백퍼센트인 형상적 한국어적 증거인 것이다.
경찰은 동물 같고,
생명은 동물 같으며
학생은 생선 같고
문학은 청준을 잡아 먹는 것이고
어차피 인간의 정신은 반드시
전복죽 안에서 스파르타쿠스
그러니까 이 직장인이 직장 생활 하다가, 쓴 논문을 정리했다는 것이, 눈이 가고, 그의 말끔한 정장 차림에, 어린아이처럼 이청준의 아현동 가스 폭발 사건이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비극을 설명해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뉴스는 때로는 국공합작처럼, 그것을 시도하는 경향성이 있다. 아이들은 무등산 저 너머에 있는 백아산 같고, 사람들은 무등산이 어머니의 산이라 불려진다는 말도 곧잘 한다. 나는 이어도가 한국말인 줄 알았다. 그냥, 섬 도 자를 가져와서, 한국어, 뜻이 불분명한 이어라는 말과 결합해서 전설의 섬 이어도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그것은 쏘냐처럼, 코난이라는 헐리웃 용사에게 짝했던 레드 쏘냐. 그것의 한국어적인 표현이 사나. 그러니까 이어도 사는 사나. 이어도에서, 러시아에서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온 러시아 여자 쏘냐. 그 말들이 다 틀리지 않는 것은, 우리는 다만 데피니션의 단계에서는 단정하나, 유씨지에서는 늘 경험도 의지도 없다 보니까, 그나마 완전한 무의미성이 되는 것보다는, 개그맨의 표현처럼, 비행기 타고, 배타고 왔다는 말을 듣는 것이 나은 것이다.
그래도 논문을 쓴 사람이, 크게 주자학적인 날개는 펼지지는 못했어도, 문제의 포괄적인 지평을 좀더 마르게 해서, 햇빛에 비추이고, 그것으로 인해 그 선탠 자국이 그대로 문단의 클러스터가 되는 것까지는 성공한 것 같다. 때로는 차별이 없다. 중국 땅에 던져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과 심정적으로는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청준을 보다 잘 알고 있었을 한국 지식 대중, 그의 영화들을 좀더 아카데믹하게 정리하고 있었을 학생 제불, 그런것들이 문제적인 이 시기에 좀더 심도 깊게, 우리끼리의 담론으로, 때로는 죽은 사람을 먹은 사람처럼 영혼의 카니발을 벌였어야 할 것을, 고작해야, 돈 코자크 콰이어, 한 명의 회사원이, 그것도 자기 시간을 쪼개가면서, 논문을 쓰고, 그것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니, 그것의 서울 대중의 법정 무소유적 현실 때문에 가슴이 여간 아픈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의 에스오에스는 꾸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대녕의 드디어, 해안가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라는 모티프의 소설이 이해가 되고, 워낙에 무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갈무리하는 작가의 동료 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청준의 글은 문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어도. 그러니까 내가 그 어린 시절에, 국책 연구 기관의 하나로서, 글을 써야 했다면 그처럼 사문난적, 지자와 현자, 무지자와 미장센의 기법을 혼융하여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그런 글을 시대의 아들처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도,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고 레드 쏘냐, 때로는 브리짓 스톤까지 하다 보니, 그의 문장류의 것이 내 손에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것은 무엇일까? 적대적인 엠엔엠이었을까? 아니면 CB400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가난했고, 방림동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말들. 아멜리아의 유서 같은. 우리는 가난했고, 전남대를 지나면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먹는 것의 아들이고, 입는 것의 아들이며, 듣는 것의 아들이다. 새소리. 그리고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적막한. 다만 다 익은 벼에 시퍼런 낫을 대는 것처럼, 잔인함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차별이 없는. 중국 땅에서 눈을 떠서, 사람을 만나 말을 하기 전까지 아무런 차이가 없는. 도자기. 인이 고갈되고 나면, 한국에서 다만 놀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왕안석, 조맹부. 머리가 누가 때렸는지 모르는데, 일년에 한번씩은 반드시 깨지는. 보이지 않는 손. 그러니까 갓오브월이라는 컴퓨터 게임에서, 주인공이나 다른 사람들이 두 개의 낫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인 것이다. 하나는 사인검. 다른 하나는 활인검. 사람을 살리는 검이라고 해서,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르고 자기를 찌르는데, 죽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다. 이어도라는 이청준은 그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멀메이드나 우파루파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검에는 살인검도 없고, 활인검도 없다. 다만 모두 다 죽는 검들인 것이다.
삶은 지겹다. 우파루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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