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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16. 1. 20.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날의 분위기라는 영화를 보았다. 안보았는데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수.보.아. 우리는 보통 책을 읽은 것을 감추는 편이다. 왜냐하면 뭘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보았다고 말하고, 아무렇게나, 질겅질겅, 오징어를 씹고, 소주 한 잔 하면서, 댓글 서울 남길 수가 있다. 댓글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이처럼 외롭고,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야만 가능한 사랑이야기를 보다보니까,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서, 집에서 먹방 보다가, 영화 본 것이 기억나서, 댓글들을 남기는, 별점과 함께, 그것의 마지막 데드싸인까지를 몬난놈이라든지, 암몬 족속이라든지, 헷족속이라든지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미국 시인 가보지 않는 길의 갈림길에 서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 특별한 서울 사랑이야기를 존재로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플라톤의 시인추방처럼, 마포대교에 시인들을 모이게 해놓고, 아라 뱃길로, 다른 나라로 추방시키는 배에 올라타게 하는 것처럼, 비존재로 여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은 존재이다. 일이 존재가 아니고서는, 고용노동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하는 대체 누가 했는지 모르는 성경 말씀을 우리가 내세울 수가 없다. 국가나 왕은 존재이다. 그것들은 커플들을 권장하고, 기본적인 아이들의 성장권을 보장한다. 분유값으로 뭘 훔쳤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해당 구청 복지과 공무원들이 출동을 해서, 진위여부를 알아보고, 초범인 경우 훈방으로 경찰들을 구워 삶고, 분유값 얼마간을 구청에서 지원하며, 한번 더 빌붙기권을 뜻하는 노란 플라스틱 카드를 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책은 성공을 거두고, 일년에 몇 번 있는 슬픈 일을 경찰들과 함께 이겨나가는 성공적인 미담 행정으로 추장을 받고 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중간 부터 눈물을 찔금찔금 흘렸는데, 사람들은 나처럼 훌쩍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남자가 자려고 했고, 여자가 호응을 했는데, 뭐 그런 내용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는지 모를 일이다는 생각을, 그들의 생각에 들어가서 해보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슬펐다. 아이들이 국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때로는 발레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 어디에, 발레를 배우다가, 바이얼린을 배우고, 일본어로 옹가쿠, 국문학으로 전과를 해서, 대학원을 나오고, 일본으로 문학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는가? 그것의 구로 디지털단지. 사람의 교복은 한 복만 있는지 모를 일인 것이다. 한 복만 있어서, 교복을 벗으면, 윤종신의 노래처럼, 사람들은 구로 디지털단지, 정신은 무슨, 그나마 의식마저도 수많은 디지털들로 해체되는 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대학을 하나의 학과만 다니고, 하나의 취직공부만 하는 것이다. 삼성에도 취직하고, 엠비씨에도 취직했다는 사람을 우리는 들은 적이 없다. 무슨 직업이 원나잇 같겠는가? 만일 그런 기형적인 관심이나 호기심 천국인 사람이 있다면, 배우가 좋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오늘은 은행원, 내일은 중학교 영어 강사, 모레는 해운대 해수욕장 안전요원, 더 큰 모래는, 그리고 영원히 들이닥치고 밀려나가는 바닷물과 같은 것은, 이런저런 알바, 지배인, 여행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직업은 정신과 같고, 우리가 정신과에 심정적으로 많이 가는 이유는 순전히 직업과 맑은 정신의 상호관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서움이 그 맑은 정신에서, 구로디지털단지, 기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연애는 언제 하겠다는 것인가? 이 부족한 에너지 한정적에서도, 연애도 한다. 여자는 내성적이고, 남자는 외왕적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연애도 못하면 안된다는 것이고, 남자는 그것만 부끄럽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신대만 나오고, 서울대영문학대학원에는 입학하지 못한다. 어원적으로도 그렇고, 어학적으로도 한계가 그러하며, 문학이라는 것은 토마스 모어가 목이 잘렸다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는 남자의 실수를 용산하기도 하고, 용인을 지나기도 하며, 용두산공원까지 돌보는 것으로 있다. 영화는 그런 남자의 적극적인 대쉬를 보아주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아름다운 말미잘을 지켜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장은 남녀간의 연애의 성장의 반복일 수가 있다. 우리는 정확히 어디가 용인자원농원인지, 과천 어린이대공원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뭐든지 가능하다.

 

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이 명해서, 멀건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시몬 베드로가, 북한산에서 내려와서, 아무런 구에다가 그물을 던지는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일단 남자가 무례하다는 것도 여자를 인지한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무례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차마고도라는 말처럼, 연애 영화 하나 없이 당나귀나 야크만 보고 있는 히말라야 풍경과도 같은 것이다. 순서를 잘 맞추면, 남자가 차마고도를 다녀왔다고 여자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로맨스의 한 장면이 없겠으나, 순서를 못 맞추면, 그곳 원주민의 이름이나, 가족들 이름이나, 우유차만 백 잔을 마시는 듯한 재외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강요된 재외 한국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면, 말이 서로 안통하고, 그래도 영화의 끝까지 한 번 가보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서양 문명을 좋아했던 것은, 서양으로 유학을 가면 성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우리의 말미잘 같은 의식과, 그것의 무딘 말솜씨가, 늘 성적으로도 강퍅한 사적이고 공적인 태도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런 식의 무용담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절대 미감을 갖고 있었고, 나의 파스텔톤은 옛날부터 아주 유명했다. 그것은 언어이고, 데지그네이션이며, 이제는 그것의 실체만을 뒤흔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게의 한국 남녀들은, 반절이 외모에서 탈락했고, 다만 무채색의 그라데이션이었으며, 형상에의 터부가 무슨 자기들이 유자의 전통에 있는 것처럼 심했고, 사랑에도 문법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모두가 다 추운 날의 콩알 같았고, 그것은 전쟁 이후의 정결의 여신 노르마 같았다. 내용은 모르지만, 어감으로나, 포괄적인 인상이 그렇다. 백제와 신라가 싸웠다면, 정말 그것을 믿고, 따르고, 신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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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일본 사람들의 안티 천황제에 준하는 것이다. 그럴려고 영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그러하다. 얼마나 영화는 백권의 책과 같고, 얼마나 영화의 인격은 클래식의 그윽한 소품들의 현신 같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영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고통스러운 피크를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째서 일본 영화가 틈만 나면 과도하며, 중국 영화는 한국에 기회조차 없고, 미국 영화는 공포로만 확진 판정이 되었는가? 그것은 부잣집 딸이 예쁠려고 해서 예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잘 먹고, 잘 입고, 공부에 필요한 치양지의 품목들이 많아서인 것이다. 인간은 예술적 동물이다.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찾아 그날로 동분서주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기를, 과도한 가치론적 표현주의 때문에 예쁘고 잘생긴 것이고, 좋은 말의 확장을 실제의 아버지와 삼촌 이모티콘들로 알아서 대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만 재밌다는 것. 그것은 부산에 선혈이 낭자하더라도, 지혈 이후의 레스 익스텐자가 성경의 제네시스와도 일맥상통하다는 것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몇 가지 요건 중에, 국민투표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베드로가 역광 속에서 그물을 던지고, 그 안에서 억지로 만난 물고기 두 마리가 연등회를 열 수 있는 확률이라고 하면, 어느 누가 그것을 존재요 있음이자 요건이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숨죽이고, 세계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