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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유비적 촌동네의 영웅과 슬픈 진실 한 진사

by 마음대로다 2012. 5. 25.

유비적 촌동네의 영웅과 슬픈 진실 한 진사

 

 

 

 

 

 

 

 

여러 사람이 걷다가, 세 사람? 그 한 사람이 새에게 똥을 맞았다. 똥습격. 다섯 사람 정도. 평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그와 같은 자연의 분노에 몸 안의 성생미세액리학이 발동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머리를 때렸다. 죽을 뻔 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내가 해석한 것이다 한다. 다른 한 사람이 날라차기로 허리를 봐버렸다. 어쩐지 어떤 만화가..... 굴러가서 아파 울고 있는데, 자연은 추한 것이다 한다. 뒤에서 돌로 그의 어깨를 치고는, 그와 같은 우연을 어떤 돌로도 해석할 수가 없다 한다. 해석은 시간이 필요하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 국가 정부 예산과 나와바리들, 영화들, 쇼들, 쇼머스트고온들, 입시제도들이 모두 필요하다.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올라타서는 수십대를 때리면서, 어째서 어째서 너에게 이와 같은 네메시스가 닥친 것이냐, 때리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것도 어떤 만화가.....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그를 절벽에 버리면서, 에이도스, 다시 태어나라 한다.

 

우리 동네는 숨죽이면서, 아무 것도 안하기, 적당히 자기도 해석의 문화적 예산에 올라타기로써만 사는지 모른다. 영웅은 태극을 직관하는 것이다. 음양은 사랑한다면서, 그대는 낙천적이다면서, 뭔 소리 지껄이는 것이냐면서 중국 어투의 한국말로써, 돼도 않는 빈천한 아시아나에 비프하는 것이고, 오행은 뱀쑈, 깡패쑈, 일본 에이브이쇼, 같은 것을 하는 것이다. 일반 민중은 뱀쑈도 재밌고, 깡패 영화도 재밌고, 적당히 즐기는 야한 영화도 재밌다고 티비에서 지껄이는 것을 보고 좋아한다. 오행일 뿐이다. 오행은 헤겔적인 정정의 철학에서 이격된, 테이블테니스적인 바이너리오포지션도 벗어나서, 뭔가 암모니우스, 홍어삼합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박대기 방전상태고, 일본 현대 성리학이며, 영화 백 편 보면서 천천히 죽는 사람이고, 일차대전 이차대전이 우리의 정신이 가장 강했을 때 누렸던 단체로 빨리 죽음이 아니었나 의심을 하게 하는 黃霧상태 같은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서, 청소년들의 복지에 의탁해서, 영화를 재빨리 만드는 사람들이 일본 얘들이고, 한국영화가 저예산적 조건에서도 부단히 영웅적인 항목들을 일궈가는 사람들이다 할 수 있다. 중국 영화의 이상한 비릿함. 도저히 제거가 되지 않는. 옹박에서는, 그 일 편의 아름다움을 저버리고, 갑자기 그들의 치석 같은 황금 옷을 입고 왕조가 쳐 등장하는 퍼포먼스.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대한 선단에서 인간을 닮은 형태를 가지고, 가혹하게 천천히 죽이는 장면의 고대 해전을 반복할 운명인 것처럼.

 

영화 에일리언은 한국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폴리탄들은 일차이차대전이 그나마 정신적인 화끈한 순자 상태의 결과였던 것처럼, 자기가 이런저런 철학가 사상가 문학가였던 것이 현실적인 삶의 자리에서는 변기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철학과 문학의 본질로부터 너무 이격되어 있고, 사실 철학과 문학이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백제들이니까, 눈만 내렸다 하면 자살특공대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폴리탄들이 되지려고 먹은 수면제의 양이 일반적인 국민들이 먹은 것의 열 배는 될 것이다. 대신에 그 지역의 유권자들이 아침에 찌뿌두둥한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동안 계속될 때가 있고, 윤번제로 의사가 된 자살자 앞으로 가서 어째서 계속 의식이 몽롱하고 피곤하고 잠만 오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지식에 관심이 없는 유권자 일반 국민의 운명처럼, 비유권자 말고, 자지만 커질 뿐이고, 의학은 돈 버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드고어한 공포 영화를 찍는 소재나 될 뿐이다. 텔미 섬딩이나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헐리웃 공포 영화들. 의사의 사랑이 최고인데, 그것은 인류 역사상 나만 가지고 있는 시계이다. 나도 그것이 불분명하다고 하면, 나머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혼자만의 방이 없고, 따뜻한 가정이 없다. 우리의 인류 역사가 이렇게도 높은 관념을 갖게 된 웰빙 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남자는, 나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편안한 시간에 철학책을 읽고, 오토바이를 탈 수 있으나, 여자들은 잠깐, 나는 침을 거의 뱉지 않으나, 그것의 속도와 궤도만큼 그것의 진리 그 자체를 입어볼 뿐이다. 임석진은 얼마나 한국어 본질의 독일어 본문을 꾸역꾸역 해석이나 했겠는가? 유니가 있었다. 유니의 음반을 내가 가장 아플 때 듣기도 했었다. 약간. 아주 약간, 북한 풍이였다. 그것의 범주적인 속도는 살인적이다 할 것이고, 감식가들은 다이아몬드로구나 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것은 해석이 아니고, 아주 많이 자기였을 것이다. 여자의 운명은 아낙사고라스가 전부인데, 그것도 만에 한 명이 될까말까, 내 앞에서는 암모니우스나 아낙사고라스 같았던 여자가, 딴 데에서는 누스가 되면, 얼마나 반복적이고 슬픈 일인 것인가? 생각해 보면, 대학 말미에, 나는 영문학과에 떨어지지 않았고, 당연히 시간적으로, 대학 내에서는 쵝오, 소설들을 제법 썼으며, 수원의 누나에게 프린트해서 보여주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김정은 같은 한 사진이었을까? 꼭 그러는 것이냐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어제 어떤 소년과 뉴첼린져, 철권 게임방에서 만났다. 여러 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나는 그만 하고자 했는데, 그게 망설이는 모습처럼 보였는지, 갑자기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실제로 그가 더 잘했고, 다섯 차례의 대결 끝에 나는 졌다. 그래서 인사로 아저씨는 간다 했다. 인문학적 진실 같았는데, 나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