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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헤겔의 고대 철학사의 철학사적 의미. 특히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by 마음대로다 2012. 5. 23.

헤겔의 고대 철학사의 철학사적 의미. 특히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혼자 있지 않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런 사회성. 말의 즉자대자성. 논리 통함의 지들끼리가 아니라, 연관의, 내게 헤겔의 인사이트가 강한 순간에 훌륭한 사람이란 의미에서의 존재자를 불러본 것이다. 출판사 본사에도 전화해보고, 절판된 것만 알고 내용을 몰라서, 혹시 사장님이 아실 지 모르니 전화를 해보래서 전화를 해보았더니, 잘 알려주셨다. 나는 유산자 계급으로부터 뭔가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흐뭇하였고, 왜냐하면, 나의 한국은 매우 높기 때문에, 인구 밀도, 산소 밀도가 희박해서, 마치 흰 빛과 검은 그림자의 세르파처럼, 뭔가 긴밀하게 지하철 이호선으로 국회의사당 대머리를 보면서 지나는, 이것도 환희, 조이,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까지 짐작해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 책요. 맞습니다. 저희 출판사 책이 맞는데, 절판된지 꽤 됐습니다. 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군요. 원저작이 미완성본으로 철학사 일권으로 되어 있는지, 한국에서 마치 시간성의 우연처럼 두 권 세 권 있는 것 중에 일 권만 번역한 것인지. 네.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혹시 사장님이 아실 지 모르니, 전화를 해보라고 했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었다. 본사는 경기도 파주, 서울 지점은 서울에 있는 모양. 목소리가 사장님이여서, 사장님이십니까? 예. 그런데요? 이자저차해서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원저작이 미완성 저작 일 권으로 끝이 난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만 이렇게 미완성인 것처럼 번역 출판된 것인가요? 아. 그 책이 원래는 모두 번역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번역가이신 임석진 교수님께서 일 권만 번역하셨는데, 계약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대단한데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딱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는데, 대단한 우연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다 번역하려고 했었어요. 교수님께 문의해보십시요. 교수님이 지금 어디 대학 교수님이신가요? 네. 명지대 교수님이실 것입니다. 교수님이나, 헤겔학회에 알아보시는 것이 보다 좋으실 것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는 답했다. 나는 예수 피에타를 내 손으로만 받는 것처럼 힘이 들었으나, 훌륭하신 두 사람으로 인해 두 사람으로, 잘 모르는 유능한 절간의 눈깔사탕과도 함께 일을 하는 것 같아서 흐뭇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부분에 이르러서, 앞 부분의 헤겔을 좋아했던 사람은 금방 관심이 떨어지고 만다. 영 흐지부지하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소크라테스 편에 들지도 않는다. 결과주의자 같고, 그냥 헤겔 같고, 정반합에서 합에 있고자 하는 것 같다. 헤겔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지 않는가? 헤겔 만큼 정정을 가로지르는, 돌파주의자가 없는데 말이다. 이 책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은 원래, 대학 도서관의 자랑으로 에이도스가 그친다. 사람이 아이 때 좋았다 나빠지고, 청년 때 좋았다 나빠지고, 아이를 낳고 좋았다 나빠지고, 늙어서 좋았다 나빠지는 것처럼, 철학은 고등학생이 대학을 품고는 가장 좋았다가, 대학 때 헤겔처럼 정정의 시간 철학자로서 가장 아름답다가, 외국 노래를 부르는 수많은 시시껄렁들을 사면초가로 해서 급격히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하는 단계로 추락하고 만다. 나의 뼈는 삐걱거리고, 살은 근육이 조금씩 풀려간다. 대신에 대학만이, 미친 듯이 섹스를 하는 것 같다. 건물은, 정말 지독한 한국어가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혐한론의 극치가 건물이라는 단어에서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앙드레 가뇽의 nelligan. 물은 원래, 바람돌이 선물이 아니면, 피를 부르게 되어 있다. 나는 바람돌이 선물마저도 사람의 지능에 간접적으로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노트북에 삼성 영문 이니셜이 싫다고 했는데, 그 분에게는 미안, 삼이나 사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건조주의자의 주장이며, 리더가 없는, 일본식 발음과 약간의 전통, 리더, 청년은 무섭도록 미치도록 바람돌이 상태가 될 때가 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면 좋지 않은가? 사람들은 소위적으로 생각한다. 둘은 다르다고. 물론 다르다. 그리고 마땅히 공부할 게 없다. 헤겔의 철학은 위기에 봉착한다. 헤겔의 철학은 대학 건물 같은가? 소년의 쥬드디옵스큐어 꿈을 익스플로이테이션하는. 소크라테스에 진입해서, 직면하는 독서적 이질감이 바로 그와 같은 종합적 표현이 아닌가 한다. 헤겔이 그것을 의도했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대흥사도 있고, 플로티누스의 하나에 관한 논문도 있고, 저먼 아이디올로지도 있고? 헤겔의 정서라면 당연 담담함이다. 대흥사의 모습은, 매우 깊은 절망이고, 충격, 청천하늘의 날벼락과 같지만, 헤겔이 그것을 보고 그것의 마땅한 약재를 서랍에서 꺼내는 것인 것이다. 선대의 철학자들도 죽음이 다들 해괴망측했다. 잘 살았던 사람이 누구인가 싶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처럼, 한국어적인 성명학에 치고 들어간 것이 별로 없다시피 한다. 아니, 다들 한국어적인 성명학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모습만큼 유사 종교적인, 기름기를 뺀 성극의 한장면이 없는 것이다. 슬픔은 재즈 피아노 같다. 슬픔은 물과 같다. 재즈 피아노적인 논리학으로는, 재즈 피아노 음악은 물과 같다는 소리인가? 그런 홀스인가? 내가 언젠가 철학사에서, 헤겔은 플라톤을 바라보는 유일한 다음 철학자라고 했던 적이 있다. 아무런 문법도, 마땅한 중간 논리도, 구체적인 내용 인용도 없이, 인상 비평을 하면, 그것이 시골 학교 선생님이지, 스콜란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다시금 세상은 재즈 피아노 같은 플로티누스 물이 아니지 싶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부분에서 죽는 것일까? 말을 타고, 두 개의 뿔을 한 투구를 쓰고, 친구 몇 명과 성문을 향해 돌격하다가 죽는 것인가? 아니면 섹스만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한 말이 이것이냐며 무한하게 읽어주는 중에, 그들은 죽고, 새 사람이 거기에 덧붙여지고 하면서 죽는 것인가? 후자는 고통의 격렬함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과거 죽음 사건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특수적인 것이다. 없다면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묘하다. 슬프고, 그것의 공기는 매우 아픔으로 있다. 고대 철학의 존재와 헤겔의 훗날 체계가 원칙적으로 하나였던 모습이었던 것일까?....... 

 

 

 

 

 

지금은 헤겔 철학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헤겔이 프랑스로 가면, 프랑스 철학자는 무슨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