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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태양의 후예 어제 15화 딱 한 편만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6. 4. 14.

태양의 후예 어제 15화 딱 한 편만을 보고













우리는 슬픔을 감출 수 없다. Our sad hindrance is beyond limit. 나는 왜 이렇게 태양의 후예 태양의 후예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거짓드라마적으로 사람들이 태양에 심취하는 것이 다만 삼성라이온즈가 아닌가 했다. 아니면 옛날 중앙고속. 광주고속은 거북이로서, 리얼리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쉼취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토끼와 거북이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토끼는 귀엽고, 보드랍고, 사랑스럽다. 거북이는, 귀엽고, 재밌고, 오래도록 달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린아이 때에 선착순을 해서,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있다면, 빵과 우유, 빵과 우유가 자라네, 빵과 우유가 자라네, 빵과 우유가 자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 그것의 깊은 무의식, 집에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 같은, 지금은 그것이 굉장히 옅어져 있겠지만, 옛날에는 먹을 것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가문의 영광,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거북이는 빨리 뛰어가 뭘 쟁취하지 못한다. 빵과 우유를 먹지 못한다. 토끼도 사실 그렇다. 특별한 목적이 없다. 눈이 빨갈 뿐. 무슨 목적 없이, 비디오나 저녁 내내 본 사람은 눈이 빨갈 것이다. 놀란 토끼 눈을 갖고, 어딘가를 무지막지하게 돌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들 목적의 왕국 안에서, 그것의 일진이 되지 못하고, 이진도 되지 못하고, 그것의 관념으로만 목적을 향유하고, 있음을 예찬하고, 다만 자기는 작은 거북이집에 돌아가고, 토끼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군인 같고, 대체 무엇이 사람을 차별하게 하는가? 그러니까, 관념의 입출입에 차별이 생기는 것인가? 태양의 후예에 내가 입출입을 못하는 차별이 있었는가? 내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내가 입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내가 알고 싶은데, 모르는 것이 있는가? 이렇게 단 하나의 노동이 목적의 왕국에 정확히 봉사하는 시간이 있을까 싶다. 숨을 쉬는 것, 판단하는 것, 행동하는 것, 기본적인 일을 하는 것, 공부하는 것, 음악을 듣는 것, 티비를 선택해서 보는 것, 그것들이 모두 g5 최신 핸드폰처럼 모듈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태양의 후예가 내게는 재미 없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소재는 늘 중요하고, 우리가 문장을 갖지 못해도, 저마다의 소재를 갖고, 작은 불꽃놀이 영화를 즐기듯이, 티비나 영화라고 비슷한 우리들의 방법론을 취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매우 다양한 징검다리를 거쳐, 태양의 후예에 올인을 하게 되었다. 그것에까지는 수많은 모듈이, 프로그램들이 붙었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태양의 후예를 보고서도, 그다지 눈물이 터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내게서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없어야 한다는 문예적인 망발을 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는 것일 것이다. 시간을 통해서. 그것은 저마다의 소중한 모듈이고, 때로는 토끼 같고, 때로는 토끼보다도 귀여운 거북이 같고 하기 때문이다. 내게 아무 소용이 없고, 나와 감각적으로 닿아 있지 않고, 내게 소유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가치가 내 눈 앞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주자학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태양의 후예를 그동안 봐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충성도가 좋지 않았는데, 그 소중한 클리쉐들을 보자니까,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닌 것이었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만난 남녀가 서로 가슴 아픈 말을 하면, 둘이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방정식을 알고 있다. 불법이기도 하고, 고전의 기록되지 못한 탑이기도 한데, 그와 같은 경험을 일절 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럴 가능성이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언제나 확인하곤 한다.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보고, 또다시 알 수 없는 시간의 끝에 이르러, 수많은 공부들의 피치를 올리는데,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조금도 거창하지 않는, 나의 문장 그대로의 진행이 문장의 이전의 형태로서 준비 태세 되어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g5는 모듈이 유명하기도 하지만, 메모리카드를 무슨 테라바이트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봤더니, 가격이 만만치 않는 것이었다. 백기가가 넘는 것을 보니까 오만원 안팎이었고, 그것을 구입하는 것도, 무경험자로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성공적으로, 택배 받고, 장착하고, 이런저런 조작의 어려움을 넘고나자, 수많은 우리네 선거의 방송들, 어느 방송국의 것이 깊이가 있었고, 아직 모듈을 받고 있지 않은 채로, 처음으로 메모리가 넘친다는 이유로 갖고 있는 mp3를 깔아 들어보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음량이 매우 풍부하고 좋았다. 또 완전히 좋다고 하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똑같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많이 달랐다. 다모를 들었고, 블레이드러너를 들었다. 이 모든 개인적인 동작들이 분명 어제의 터져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게끔 했을 것이다. 혼자 지내면서 감정의 과잉이라는 것은 결코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고 할 때, 그것이 적당히 사람들의 것처럼 건강하고, 잘 말라있고 해야지, 슬픔과 슬픔의 비유로서의 늪지에 빠지게 되면, 결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나라는 사막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사막의 풍경과 이렇게 유비되는 것이 많을까? 사람은 보수적이다. 그것은 오아시스와 같다. 사람은 진보적이다. 목적 없이, 나침반도 없이, 다만 살기 위해 사막을 걷다보면 반드시 걸음걸이가 미끄러질 것이다. 태양의 후예를 보게 된 것은, 다른 드라마를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예고 되었던 것이다. 다들 선거방송을 하고, 태양의 후예만 드라마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최신형 핸드폰을 갖고 동작을 잘 시킨 다음에, 그것의 뇌파와 비슷하게 연속하는 것처럼, 최신 트랜드 드라마를 잘 볼 수 있게 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초반에 주인공은 깊은 헤테로에 빠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 차분하게 계속보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카테고리들이 있고, 그것은 저마다의 생의 활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 것이 신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계속해서 태어나고 자라난다는 것이 신기한 것인 것이다. 그 어려운 공부를 하고,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슬픔이 차오르기도 하고 그렇다. 어쩌면 화랑은 두번째 화랑을 보았을 것이다. 첫번째 화랑은 주어진 것이고, 가장 영웅적으로 말하면 스스로 그것을 이름하여 사람들과 나눈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그치지 않고, 공부는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었다. 자기보다 배우지 못한 어린 화랑들이 전쟁터에 나갔고, 그것들이 먼저 까마득히 나이든 사람들이 되면, 화랑이란 이름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것이었구나 발견하고는 얼마나 눈물이 터져나왔겠는가?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들도 궁금하지만, 혼자서 오토바이 여행을 하는 것도 국문학과 학생들에게는 궁금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서였겠는가? 세상 권력을 조금이라도 얻고자 해서였겠는가? 그것이 참 올림푸스이기 때문에 그랬겠는가? 없지 않아, 다들 눈뭉치처럼 순결하게 뭉쳐 있겠다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유식으로서, 국문학과 학생들, 사학과, 미술학과 학생들은 오토바이 여행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서 떠나는 배낭여행, 자동차나 기차 여행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 여행은 굉장히 담박적이다. 사람은 태양이 돈이다. 그러나 자동차나 기차는 그것의 천장이 약 오할을 가져간다. 우리는 더운 여름날 그것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시골학교에 학생이 한 명 뿐이고, 자기가 늘 전교 일등인 것이다. 여럿이 투어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열명이면 그들이 전교 십등까지인 것이다. 그것의 벅찬 존재에의 사랑을 말로다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먹을 것을 꺼내 먹는다. 그것의 당연한 소리가, 그러나 알 수 없는 음악이 그것에 늘 언제나 결집한다.

비오는 날 서울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비가 와도, 오토바이 타고, 사람 없는 바닷가에서 먹을 것을 꺼내 먹는 것. 그런 늘 가상의 죽음을 죽는 흐름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숱한 헤테로를 뜻한다. 테헤란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생계의 카테고리이나, 그것을 읽고, 감지하고, 이동하는 순간에 보게 되면, 마땅한 명사형이 생각나지 않은 헤테로인 것이다. 달콤한 것은 싫다고 했다가, 그래서 쓴 술을 마시다가, 도리어 달짝지끈한 안주빨을 세우다가, 달콤한 것은 싫다고 했다가, 그렇다고 진지하고 딱딱하고 심각한 음악은 죽기까지 별로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 위험. DANGER. 영원히 그와 같은 단군 신화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도 어제는 그랬다. 늘 미국 영화의 도움으로, 드라마를 통한 사막 여행을 했던 우리가, 저마다의 작은 헤테로를 끌어 모아, 약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도달한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드라마를 본 후, 옛날 우리 댄스 히트곡들을 듣다가, 그와 같은 진보에 놀란 것인지 나의 보수성이 그만 터지고 만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