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론에 관하여, 케이쓰 자렛의 음악을 배경으로
사람의 아들은 부귀빈천이 파노라마틱하다. 삶은 돌격대라고 아버지가 가르치고, 훌륭한 글을 가르치고, 훌륭한 마음씨, 훌륭한 체력을 함양시킨다면, 그는 정말이지 훌륭한 지도자, 사회사상가, 예술가, 군인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돌격대라면서, 카메라 앞에서는 에른스트 피셔의 계단이나 오르고, 주자 앞에서는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이상한 오줌대, 이상한 여성대, 이상한 변소대 하는 모습으로나 실질 매개 변수 살아간다면, 자기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면서, 그의 아들 딸들은 나중에는 돼지장수 소장수에게나 팔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와 같은 운명이 두렵기도 하고, 그들도 마른자리를 알아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은 야구를 배우고, 음악도, 송소희 배우고, 이런저런 재미나는 동작이나 사진 촬영 같은 것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을 펜실바니아, 스탄 게츠, 릴리 함메르, 유명한 재즈 트럼피스트, 중국인 동작동이나 동파육의 나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이완하며, 이완하고, 이완하며, 김태희하며, 이완하고, 이완하며, 이완되고, 이완하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끊임없이 릴리스한다. 릴렉스. 처음에는 디즈니 만화 영화들을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다면서 보지만, 자기가 어린아이의 기저귀 같은 꼴이 되고 나면, 그것의 눈높이와 대지의 샹들리에가 그렇게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의 딸이라고 하는, 그와 같은 딱히 두드러지지 않는 정치 이념의 케츠 프레이즈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이다. 초원의 집. 레이크 루이스. 시월애의 미국 리메이크 작품 같은 것. 송지효가 어제 게리슨 유격대와 함께 묘한 최선을 다해 플레이에 임했던 것,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채널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생각 없이 오래살다가 장파형을 당하고, 고작해야 한국 음식이 고추 밭에 고추 서듯이 서는 목격을 크로스인카운터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으로 처음 이민을 갔을 때는, 자기들이 미국의 시카고 빌딩의 모습일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미국 간첩인 레드 제펠린이 그런 말을 했지 않은가? 자기는 시카고에 가겠다고. 무슨무슨 시카고. 무슨무슨 시카고. 공교육 정상화도 마치고, 그 비싼 사교육도 마치고, 아들과 딸들이 유학을 가는 유행에 가족들이 모두 올인을 해서, 송혜교, 류현진, 미국 어느 도시에 떨어졌더니만, 후회는 그날 즉시로 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젊은 것들이 그렇게 사가지 없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아뭬리칸 스똬일. 그리고 발음이 이상하면 햄버거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래, 미국말 전체가 서로간에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이론이 아니되는 것인 것이다. 사람들이 특수 명사 A를 말할 때, 그것은 데지그네이션 B를 분명히 상정하는 것이지만, CDEF등의 순열적인 질서 뿐 아니라, GHIK등의 화용론적인 전체 등을 나타내고 뜻하는 것이다. 인기 아이돌 설현이, 내가 끔직히도 사랑하는, 그런데 약간 미국식으로 발음이 꼬이는 것이, 의도라고 하면 훌륭한 것이고, 의도가 아니라고 하면 매우 대륙간 탄도탄같이 신비롭다 여길 만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이치이다.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의 딸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세대간의 드라마에 거의 모든 게 포착된다 하겠다. 드라마를 믿지 말라. 드라마는 가족 없는 작가의 조용한 한국적 정신병원일 뿐이다. 사람을 한국 음식을 못먹게 하면, 짜증이 나고, 자장면, 더욱 못먹게 하면, 가족 간의 사이가 나빠지며, 그보다 더욱 못먹게 하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가족 드라마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이 암흑의 핵심인데 말이다. 그게 무슨 사람이고, 그것이 무슨 가족이며, 그것이 무슨 사람의 아들과 딸들이겠는가? 다만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의 단자들이 아니겠는가? 케이쓰 자렛의 음악들을 듣다보면, 그는 천재이고,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다양하며, 미국의 재즈 정신, 보스톤이나 펜실바니아, 니콜라스 케이지, 선셋블로바드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부 내 친구 보거스처럼, 퍼져 있고, 도저히 주자는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재즈나 쳐 듣고 있다. 퍼지도 있고, 재즈도 있고. 퍼지지 않는다면, 그나마 재즈 정신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보스톤 티파티 정신.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그리고 영화적인 알프레드 히치콕. 이창. 버티고. 위대한 게츠비. 이차대전에서의 승리. 그것은 정말이지 미국의 피크가 아니었나 한다. 소련은 경쟁도 못해보고, 버거스들 때문에, 일찍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인다. 교육은 최면에도 있고, 닥달에도 있는데, 미국이 괜찮은 물질문명의 문화국가로서 그것의 물증을 하나씩 둘씩 남기는 길을 갔다고 하면, 유럽과 소련은 두 개의 발전소를 풀가동하면서, 최면도 있고, 닥달도 있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청년 사상가들을 제법 배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움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듯이, 고작해야 그와 같은 대상이 미국이 되는 것을 보고, 소련은 몰락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자는 자유주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라는 것이 그나마 미국인지, 아니면 우리 사는 모든 것의 기원으로서의 쥬래식 파크인지, 세상 누구도, 어느 누구도, 철학자도, 하이에크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가면, 자기의 오랜 의식의 채널 때문에, 등급이 그만 케이쓰 자렛만 해진다. 사람의 아들과 딸들에는 변수가 많으나, 하나님의 아들에는 변수가 별로 없는 것이다. 우리는 늘 동물의 아들과 딸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사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지식과 능력, 사회적 지위와 재산 등에 관심이 가지, 하루 종일 만나는, 수많은 아픈 사람에의 전이와 치료, 현장, 때로는 그들 죽음과의 동일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과, 거의 완벽하게 같은 확률적 사실인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영문 번역서를 읽다 보면, 영문학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질서를 만나게 된다. 영국이 몰락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국문학적 이기주의 때문일 것이다. 못난 인간들이 학제와 출판, 교육과 학교 전반을 장악해서일 것이다. 얼마나 영어가 아름다운지 모른다. 굉장히 뜻밖이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영문학이 그렇게 애써서 달성하려고 했던, 문체의 위대한 높이가, 이미 까마득히 오래 전에 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토릭의 기술만 해도 그렇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뜻밖의 사실을 만나게 된다. 영어가, 화용론적 가능성으로서의 영문학이, 미래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유럽에 먼저 뿌려놓고, 자기들이 다시금 오래도록 살아서, 그것을 회수하는 것으로다가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와 같은 가설에서 묘한 웃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리스의 지명들과 인물들의 이름들이다. 그것들의 지명들과 인명들은 한국어가 반절이고, 김연아의 칼날 같은 것이 나머지 반절이다. 그리고 중국어는 서양어들과 같은 주술목 구조이면서, 수많은 서양의 기법들은 갖고 있지 않고, 무식한 것들처럼 무시하고 있기까지 한다. 무식함이란 유식한 사람의 들숨이거나, 날숨이기도 하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급하게 찾는 물건의 이름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그렇게 말이 되어지고, 또한 그렇게 말이 되는 것으로만 진행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급하게 찾는 물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것처럼 살게 되는 것일까? 정신이 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서양어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과정 중의 없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어적인 담백함도 없다. 그렇다고 중국어적인 낭만과 실제도 없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문법들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데, 한국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전치사, 투부정사, 접속사, 의문대명사 등을 음악적으로 그렇게 잘 읽으면서, 인명과 지명은 자기가 무슨 대가인 것처럼 잘 못 읽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은 한번도 잘 못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늘 잘 못 읽고, 잘 못 들으며,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답하는 것을 일상다방사로 아는 것이다. 얼마나 속으로 포기하고 살겠는가? 중국 사람들은. 영국과 독일, 그리스와 이태리는 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자기들의 구어체의 현실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믿고, 오만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육은 그저 어려서부터 잘될 것이라는 최면이고, 그래서 최면에서 풀리게 되면, 아픔이 몇몇 사람에서부터 도지게 되는 것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중국문학적 대계..... (0) | 2016.07.15 |
---|---|
여자의 비밀 1편을 보고 (0) | 2016.06.28 |
부스지마유리코의 적나나한 일기 일편을 보고 (0) | 2016.05.21 |
태양의 후예 어제 15화 딱 한 편만을 보고 (0) | 2016.04.14 |
오늘 육룡이 나르샤, 삼봉 정도전의 죽음을 두고 (0) | 2016.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