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중국문학적 대계
우리는 난중일기를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독서하고, 훈련하고, 지옥훈련하고, 공포의 외인구단 해왔는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 이미 천연덕스럽게, 오리, 우리 곁에 있는 고전들을 모르쇠하고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바쁘고, 핫잇슈, 늘 일에 치이고, 여유가 없고 한다지만, 과연 그런지, 여자 친구가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세렝게티로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사자가 우리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광주나 서울에 살면서도 걱정할 수 있는 것이다. Physicality is beastiality 는 아닐 것인데, 늘 신사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다만 어린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유혈이 낭자하는 시간에는 늘 언제나 차분한 인격의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생기는 것이다. 동물 이름의 야구 선수들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들끼리는 친구들이 많고, 그렇게 방송 중에, 혹은 기자들에게, 일침을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강정호 사건만 봐도 그렇다. 즉시 아니라고 하는 말을 어째서 하지 않는가? 머리가 속초 지역만 포켓몬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다만 말만 못하는 어떤 순박한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다. 우연히 미국에까지 가 있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는 문명의 혜택일 수 있을 것이다. 최대수혜자 같은. 공부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사람은 없는데, 피지컬리티이스 비스티얼러티의 영문학적 단칼에 머리가 잘릴 것이 뻔한 사람들만 이렇게 국제적인 돈의 가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득구 같은. 최배달 같은. 아오키 같은.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사람들은 어쩌면 멋진 신세계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강석이라는 교통조사계의 조사 내용으로 보면, 없던 길도 만들어서,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손의 배트에 맞은 것처럼 사건이 그려져 있는, 그런 시절 이후로다가 유독 야구 선수들이 미국에서 인기를 끈다는 것이 영 마음이 아픈 것이다. 대체 추신수 새끼는 어째서 일침을 놓은 것일까? 돈이 많아서, 이 지역에도, 저 지역에도 땅을 아주 많이 살 것 같이 생긴 유시민 전장관이? 일침을 놓는다는 것이 그렇게 산뜻하고, 지 맘대로고, 뭐든지 클러치 조작하는 것 같고, 주변의 악종들이 많은 일들을 벌인 다음에는, 보력에 아무런 장애와 의식이 없는 남자는 그렇게 말의 조력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 같은 것이다. 그들의 해외적인 명성이라는 것이. 그것도 진짜 여자가 아닌. 이상한 생명체. 란자완스 같은......
노신의 작품들을 보면 하찮기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보력도 아니고, 순자의 가필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대적인 소설들도 아니다. 어쩌면 추신수는 가장 고상하게, 노신의 작품들도 국문학이다 하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주자가 죽지 못하고, 글을 쓰는 나머지, 악마적인 하핑들이 너무 많이 이뤄지고 있어서, 고통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상해에서 일어나면, 상상, 중경에서 일어나면, 노신이 가자는 대로 한 두 시간 가는 것이 그렇게 괜찮고, 이것이 문학인가? 이것이, 고래와 쏘데스까? 근대문학인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중국은 고전 문학이 많고, 삼국지만, 서유기만 읽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못 읽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처지에, 남여상열지사 같은, 그런 연애담이 주로 구성되는 근대문학은 사치스러운 것인 것이다. 이념이 빛나는 문학이라는 것은 번역되는 것이 없다.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념이 빛나는 문학이란, 원인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이다. 그것을 하나씩 하다가, 사람들은 죽기까지 이인자로서의 왕이 되길 원하지, 어느 한쪽의 견습생으로 다시 들어가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순간순간 함께 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면, 존재의 빛에 노출이 되고, 사람들은 우리나라 아이돌 여가수 최진리를 깨닫게 되어서, 도저히 다음의 정신적 작업을 이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민란꾼되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괜찮은 것이다. 문학도 되고, 어찌 보면 철학도 된다. 그렇다고 보니,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것도, 뭔가 사람들에게 깊이 있어 보이기를 소망하기 때문이고, 문학을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런 클래식한 분위기가 노출되기를 갈망해서가 아니겠는가?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많이 먹기 때문에, 그와 같은 양명이나, 보력적 가능성을 일찌감치 접어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모든 학과의 초심자에게서도, 소박한 말투와 생각의 꾸러미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럭무럭 재크와 콩나무처럼 자라지 못해서 탈이지.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 특히 중국으로 갈수록, 사람들은 처음에 만나는 사신에게서 보력을 구입한 다음에, 그것을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 이어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면, 굉장히 문학적으로 치달을려고 노력한 것이 엿보인다. 철학을 시도하다가, 그것이 어감에도 맞지 않고, 작가의 자격에도, 남자의 자격, 없는 것 같은, 그런 희망 고문 같은 것이 진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제의, 그리고 근대와 현대의 갈림길에서의, 대륙의 지식인이 고뇌하는 내면적 대상이라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것의 사회과학적 배경을 모두 제하고 난 다음에는, 그냥 그렇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차라리 철학을 하지?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에피소드와 철학적 정리가 아닐까? 꼭 공산당원들이, 문건이 아닌 무슨 재판에서나, 사람들을 상대로 그렇게 원시적인 문예력을 과시해야 하는가? 성공한 예도 없고, 오직 파괴에 대하여, 그래서 중국에서 역대 가장 위대한 이론의 지평을 남에게서 끌어왔으면서도, 그것을 선별해서 지속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독특한 지식인이나 지도자, 사상가가 말을, 신문지상에 많이, 한국 사람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고, 차원의 변경을 참지를 못해서, 불이 꺼진 전봇대 아래에서 오바이트를, 그렇게 한 것 같은 것이나 사람들은 차일피일 접해왔던 것이다. 윤동주를 싫어하지만, 내가 지금 고통스러워서, 보상심리 같은, 중국에 가면 황제에 오를 수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지만. 노신이 꽃잎을 주웠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했었다. 신을 벗은 것 같기도 하고, 남녀 관계가 보이지 않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중국의 정신이 규방이나 환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사 같은 남자의 모습으로다가 내접하는 것 같다고 환영을 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통스러울 때 보면, 위로가 되는, 그와 같은 차원변경선 정도나 되는 것이었다.
국가는 성실하다. 인문학적 판단 같은 것은 노신에게나 줘버려야 할 것이다. 인문학적 판단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판다, 국가의 벽돌 같은 성실을 가끔 가져오기도 한다. 노동하는 곳에서, 벽돌을 등짐에 담아주면, 그것을 메고 집에까지 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어차피 책이 많고, 백에 한 가지만 읽는다고 해도, 현대적인 것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같은 것을 보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에, 말을 거들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현대화에 실패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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