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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어째서 작품이 있고, 비평은 없을 수 있는가?

by 마음대로다 2016. 7. 28.


어째서 작품이 있고, 비평은 없을 수 있는가?







그와 같은 헤테로 경험은 우리들에게 이미 산재되어 있고, 다만 그것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우리가 이사를 한 것이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과 오디세이를 읽고 있다보면, 늘 어느 하나에 부족함을 느낀다. 오디세이만 읽다보면, 잔혹하고, 약간 알딸딸하고, 영향의 불안이 생기고, 아무개는 다른 맥락에서 썼겠지만, 정치학만 읽다보면, 무슨 차인지 모르겠고, 때로는 지금의 감각으로는 마땅치 않는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그의 프렌차이즈 대리점이, 그렇게까지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신비하기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플라톤과 무슨 차이가 있고, 그렇게 우리는 설명해왔는지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고개 각도의 처녀가 잇슈가 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레토릭을 읽다보면, 시학하고 또 많이 달라서, 더운 날 다시 읽다보면, 고개가 갸웃해지고, 눈물까지도 남의 정성을 끌어와서 흘릴 것 같은 것이다. 오늘의 나의 명제. 어째서 작품이 있고, 비평은 없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의 천년 여왕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틈만 나면, 여왕의 상징을 사용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런데까지 한가하게 생각을 끌어안고 들어가기가 보통의 남자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그렇겠는가? 늘 여자들은 여자들과 싸우고, 남자들이 일년에 흘릴 눈물을 여자들은 단 하루에 모두 흘릴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사하지 못한다. 그렇게 이사하기를 학수고대하면서도 말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좀더 높은 곳으로, 황토지역에 있는 사람은 좀더 녹음의 우거진 곳으로. 한국 사람들이 한국 말로 별로 좋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는 것만 보다가는, 차라리 일본으로 가서, 말이 안통하는 낭만과 함께,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거리를 깨끗하게 가꾸는 그들의 현재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레토릭이면, 천년 동안 욹어먹고, 그 비슷한 호흡과, 느낌, 중동 어느 지역에 있는 고건축 같은 것으로서의 페트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일까? 분명 레토릭에는, 그렇게 가볍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보통 성장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고 거리를 나서는 여자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문예에 대해서 한나처럼 관심이 없고, 여자라고 한다면 그 모든 가벼운 말들조차, 여자의 실재에 걸쳐서는 무거운 말이 갑자기 되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있다. 그리고 남자와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데이트는, 중첩적이다. 데이트는. 이전의 데이트이고, 그리고 나중의 데이트의 육체적인 부모가 되어준다. 물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유산으로 남기지는 못할지언정, 어느 누가 자기 아버지가 다만 외롭게만 살고, 가진 돈이 없고, 자기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들어, 원망하고, 증오하고 하겠는가? 다만 아버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산의 어떤 거리와 모퉁이에서처럼, 신비하다 하지 않겠는가? 플라톤과 영도. 플라타너스 나무와. 부산 보다 안쪽의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빚을 갚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고상한 대지와 무대를 산다. 그러나 여자는 데이트를 나서지 못한다. 가장 쉽고, 가장 포켓북 같고, 가장 그나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일지라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틀어서, 성경까지도 아울러서, 여자는 그와 같은 문예지의 데이트를 나서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작품이 있고, 비평은 없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은 레토릭에 이미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신비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의 요점이 부산의 영도 같고, 영도 대교 같다는 것이다. 어둠이 깊어지고, 바닷바람만 거세지면, 딱히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같은 나그네 같은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학로 연극의 장소처럼만 보였는 것이다. 영도. 우리는 의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작품까지는 어떻게든지, 그 또한 영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보통의 문학과에서, 또는 예술 계통에서, 남자가 선도하고, 여자가 부창부수하는 것은 아름다운 하모니와 같다. 여자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과에 온 것은 아니고, 남자는 늘 이런저런 비평서들을 읽어서 마땅한 테마가 생기면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불빛은 아름답고, 음식은 부족한 듯, 또한 부족하지 않게 조달이 된다. 어째서 문학과의 여성 영혼은 남자의 비판의 말과 함께 저 멀리 있는 중국의 평원을 질주하는가? 항우처럼. 우미인처럼.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착시와 같은 것이다. 여자가 작품을 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인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운동 안에서, 일초에 한 백번을 움직이는, 그 이상도 가능하는, 그와 같은 엄청난 힘과 운동의 언어 안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동정녀이고, 우리는 모두가 작품의 수태고지를 받는다. 상상임신을 하고, 아이가 임신 도중에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데이트처럼,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아버지가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도, 그 모든 것이 신비하다면서 보고 싶은 궁금증도 생기는 것이다. 한번의 데이트처럼 우리는 영혼이 결혼을 하고, 그래서 결혼이라는 말이 운율이 맞다, 우리는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건물 안에서,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자기도 힘을 선물 받아 사는 것이다. 그러니 단 한번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비평까지는 너무나 먼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가요를 들으면서, 기차역에서 영원으로 사라지는 길을 바라본다. 그것은 유치하지도 않고, 보릿고개, 흑백영화, 열길 물 속을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한길 사람 속까지도 깨끗했을 것 같은 친구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너무 작품까지가 힘들고, 사람들도 작품을 보면서 전체가 항복을 하기 때문에, 그것의 하나님까지를 어쩌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예비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영혼의 습관으로써, 우리는 작품을 상대하는 것일 수 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누디즘. 관념의 단 하나가 아닌. 단 한 개. 그것은 실제 누디즘으로도 그렇고, 아무런 작품도, 비평도 없이, 연극적인 대결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것으로도 그렇다. 드라마 더블유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최근의 부산행도 그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좀비라고는 생각하지 않지 않는가? 좀비라고 생각하게 되면, 너무 춥고, 영화속 등장 인물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는, 평범한 작품에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보통의 사람은 그렇게, 작품에서조차 멀기가 한이 없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비평가가 없는 것은, 죄목도 되지 않는다. 나는 사형을 당할 것이다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음 날로 무죄방면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옛날보다, 비평가만 되어도 우러르고 했던 시대는 되지 못하는 것으로 비무장경계지역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