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 도서관에서 시대와 철학 첫 논문을 읽고, 얼른 당기는 담배 연기.....
여자가 남은 자 사상일까? 남자가 남은 자 사상일까? 남은 자 사상이라고, 교회사에 나름 역사적 기록이 있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뭔가. 남아 있다는 것이. 항거 같은 것인가? 사람들이 다들 제도권적인 기독교를 따를 때, 기필코 본질을, 사상을, 민중을, 그렇게 최후까지 남아서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인가? 주체도, 년도도, 지역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그렇게 정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자 사상. 그것은 남자일까? 아니면 여자일까?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기초가 없는 것이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철학 잡지가 기초가 없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남은 자 사상처럼, 기초도 없고, 플라톤, 철학도, 철학 잡지이면서 없고 한다. 우리는 늘 영겁회귀를 한다. 그것도 뜻이 심신미약하고, 정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또 하나의 프렌차이즈를 어쩔 수 없이 이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숨은 맛집이나, 전통 맛집, 우연히 아름답다고 무작정 아무데나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프렌차이즈에 온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 그것은 무슨 뜻을 의미하겠는가?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어쩌면 미각이 되살아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시에서의 삶이, 지치고,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즐겁지가 않다가, 자연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보니까, 이제는 그런 소소한 마음과 몸과 마음가짐 같은 것이 되돌아보아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의, 제로 함수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부터 많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철학은 미학적 제로 함수였는지 모른다. 철학마저도, 질리다가, 훌륭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다시 공부할 때 얼마나 다시금 재밌겠는가, 그런 것인 것이다.
너무나 소년 같은. 너무나 격에 맞지 않는. 너무나 제로 함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드러내고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답고, 그래서 내가 아른하임의 미학책을 못읽었구나 수학적으로 재분석이 되고 있었다. 모든 사상은, 철학은, 이론은, 다들 미학이고, 미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을 남발하면, 그것이 자연적 객관성이든, 변증법적 객관성이든 간에, 제로함수도 다시금 얻지 못할 것이다는 내적 분비 같은 그런 판단이 있어서 삼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른하임은, 그리고 수많은 이런 제로 함수의 화신들을 키우는, 미학이라는 학과의 극초단파 장학 퀴즈는 그런 것을 강의할 수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러니까 강의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보통 아름다운 것을 가리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는데, 사실은 능력도 없는 것이다. 미학은 격정적이고, 일본 사진가의 한국 역사에 대한 잦은 탐방과 사진 찍기 같은,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맹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언어에 위계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만 섹스 같은 것이나 의구심을 갖는 단계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미학은 살아있다. 그것은 소년의 출사 같은 것이다. 위의 논문도, 행복한 왕자님처럼 많은 부분, 전문성과 가치를 넘겨주고 있다. 하나는 철학이요, 그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칸트요, 칸트는 철학이 아닌지,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쉽이고, 보다 아마추어리즘이 빛나는 지식 글쓰기가 얼마든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정식 논문의 문장들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 않는 작업으로서의 인용이고, 처음인지, 아니면 그런 구체적인 작업을 모두 거치고, 어쩌면 서론격인 것을 내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인지.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 정의에 대한 필사적인 생의 피치이다. 뭐가 아름답다는 것인가?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인가? 아직까지도 청둥오리가 무중 상태인 것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년의 출사이다. 그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숱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여자가 아프기도 하고, 남자가 아프기도 하며, 아픈 남자가 바라 보는 남매의 아픔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대적인 아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꾀병처럼, 출사를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새들을 다 꿰고 있다. 그것은 예술적인 클리쉐이다. 그리고 아직 피카레스크에 오염되지 않는 픽쳐레스크라고 보기에는, 다만 어떤 무규정적인 난봉황새인 것이다. 옆에 누군가 있다면, 다만 유학의 쓸쓸한 담즙 같은 스펙이고, 하이델베르크? 여자라면 그나마 취준생은 되겠으며, 영혼의,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있는 것도 같은 것이다. 힘이 없는 아버지가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아니스티. 딱히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개념, 그리고 미장쎈 같은 논리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뇌성마비 증세가 있는 아이의 소박한 외침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빠. 아빠.
그것은 인도 말일까?
아빠. 아빠.
아무나 붙잡고. 별로 친하지도 않는. 그러나 계급들. 만일 그것까지도 반성하고자 하면 얼마나 만들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 많은가?.....
동방불패의 난봉황의 죽음과 오버랩이 되는
자연적인 신품종의 발견
*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서도 물러날 것이다......
어린이 논문은 원래 그와 같은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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