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건물
이제는 늙어서 볼품 없이 변한, 고소영 느낌도 나고, 모델 이소라 삘도 나는,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늘 언제나 정신과의사를 동경하였었다. 내 둘째 누나는 내가 수원을 동경한 적이 없는데, 수원으로 부산에서 이사를 했었다. 왜냐하면, 정신과의사의 능력은 어쩌면 교차로 같은, 워크넷 같은, 알바천국 같은, 프로이트가 토템적인 병증이라고 지적한 관념의 만능을 선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대게의 직업적인 정신과의사들은 그들의 격물치지가 불쌍한 환우관계 뿐이다. 그것은 미망이라고 할 만 하다. 양파망에 환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주 싱싱하다. 김연아가 선전을 했었는, 그런 싱싱함이 있다. 얼마나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나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물을 정확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입체, 그것의 체적, 그것의 어떤, 다시 말하지만 대수의 그래프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도 안보고 결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욕망을 참을 수 없겠거든 결혼하라고 했었다.
우리는 수많은 산천어들을 지나다닌다. 엄밀히 말해, 산천어들이 우리는 모여 살고, 겨울에는 산천어 축제를 하는 것이다.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와 같은 언론 권력, 매독 같은, 아무리 바하의 평균율에 걸쳐, 자기들이 산천어를 잡고 싶어도, 수렵하고, 채집하고 싶어도, 자기들이 산천어가 되는, 걸그룹의 삐링삐링 하는, 솔직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외국인들의 해외 여행이라는 것은, 누군가 아름답게 설명하여서, 과연 자기들의 사건사고가 블랙홀의 영향 때문인지, 그것이 궁금하여서 그럴 수 있다. 무슨 오지에도, 중국, 일본, 인도, 그렇게 유럽을 뛰쳐나온, 미국에도 갈 곳이 천지로 넘치구만, 대체 그것의 인구수를 어떻게 조달하는지, 그래서 실제로 저녁에는 통금으로다가 사람들을 가두는지,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내 말이 맞을 것이다. 뉴스는 뉴스대로 보도를 하고, 늘 그런 식이니까, 믿었던 영화마저 한계치에 이르러 더이상의 설명의 능력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니까, 아무런 죄 없는 블랙홀의 영향으로 자기가 다치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죽고, 잡아먹히고, 특히 말할 수 없는 것일수록 더더욱 특히 가련하고 불쌍한 일자의 평균율이 넘치는데, 잡아먹히고 했는지, 그래서 인종은 달라도 형태는 비슷한 사람을 찾으러, 누군가 노잣돈을 보태주었는지,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일 수 있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음악이 늘 넘치고, 해결하지 못할 일들이 많으면, 올림푸스 신전에서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은근한 암시처럼, 못생김이 근처에 있다보면, 두려움이 도지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 그것을 대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고,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고, 약간의 부창부수 같은, 선남선녀 같은 동양적인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피력하기도 한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비극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제국이 팽창한 루트를 따라 처음에는 여행을 떠났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 않은가? 우리는 동양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로서, 그것의 안타까움 때문에 일본에도, 중국에도, 동남아에도 자주 가는 것이지 않는가? 유럽은 자기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단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잘살고, 뚜르드 여행으로 시간을 탕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산천어들을 지난다. 우리들의 노동은 극초단파와 같다. 클래식은 문예지이겠는가? 아니면 보통의 노동의 극초단파이겠는가? 레스피기의 씨실리아나를 듣다보면, 그것이 하나로 엮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슬픔의 극초단파. 그러나 날실과 씨실. 씨실리아나. 내가 이태리 청년을 만나고, 어여쁜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것들의 말이 늘 한결 같이 마키아벨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어부지리나, 타산지석이나, 영광굴비처럼, 일종의 관습과 견습 그것들의 대상적 관계로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나 군주론에는 상식이 넘치는지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너무한 사람인 것이다. 르네상스가 이태리에서 시작한 것이 있다고 해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의 이상한 원색의 종교화들은 아무런 쓰잘데기가 없어지고 만다. 군주는 아름답고, 절대적이다. 뿌린스 베아티스모, 압솔틸리스. 그것은 내가 요즘에 미는 말로써의, 사탄의 나라에 가면 사탄이 따로 없다는 것과 진배 없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여행하여도 극초단파를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의 사각형은 유독 도드라지고, 벽돌들도, 우리들도 옛날에 그랬겠지만, 정말이지 처음 가진 자들의 죽음 같은 의지처럼, 넘치고, 화려하고, 말못하는 몽골인의 씨실리아나처럼 문명을 동경하고, 문예를 사랑하고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산천어 같은, 산천어 축제 같은, 겨울철 발을 동동거리는, 약간 시간 제한이 있는 옛시절의 추억 같은 씨실리아나인 것이다.
대뜸 직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내가 정신 문제로 병원에를 가서, 만난 사람이다 보니까, 반가움은 밥통 베가가 되었다. 나도 물론 반가운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별로 보기 싫은 사람 천지이고, 그 중에 좋은 사람의 커트라인이 낮다보니까, 현균이의 서울대학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 같아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다들 보이지 않게 잘하고, 빠지지 않고 잘하고, 못하는 것이 순수한 시골 청년처럼 분명하고, 내가 늘 못하는 것이 많고, 그랬는 것이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키요미츠테라처럼 끌고 다녔고, 사람들은 우연히 문장들이 일종의 전자기 반응처럼 점핑을 하였고, 지금까지 인식론적 단절, 모를 수 밖에 없는,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것처럼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이 그들의 욕심 때문에 많이 생겼고, 이 정도면 싫어하겠지 했더니, 그것의 정도적인 아름다움도 있지만, 아주 질색해하는 것들이 발견된 것도 같다. 그런 것은 사람들은 안하는 것이 좋다. 사람은 결코 실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의 힘이 강력하거나, 형이상학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실험을 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와 같은 형용사를, 체스의 말판에 올린 것처럼, 올려보았다. 직업을 누군가 알선해준다면 마다하겠습니까? 사소한 것들이 늘 걸려 있고, 어렵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직업입니까? 단단함입니까? 당연히 단단함입니다. 마음으로도 단단하고, 지식으로도 단단하고. 직업을 가진 사람을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단단함을 좋아하는 것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산천어 같은 직업인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는지 모른다. 정신과의사라는 것이 그렇다. 정신분석학과 그렇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민간인의 눈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월출산과 무등산 만큼이나, 차가 없는 것을 상정해서, 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의사에게 환자들은 단지 극초단파 같은 것일 수 있다. 씨실리아나가 발생이 되지 않는. 복도. 병원. 사람들. 환자의 가족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끄 라깡이 비상한 의식의 소유자이며, 세계 지리의 대가라는 것이 증명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인이 약물이 아닌데, 어째서 약물로 치료하는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이다. 정신과의사들은 극초단파의, 고통의, 두려움의, 같은 극초단파의 사회 권력을 선망하는, 내게는 자기도 싫은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었을 텐데, 실험을 하지 말랬지? 결국에는 나의 기억 속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신과의사들은 대게 약물로 치료한다. 신체가 절단이 되면, 약물로 치료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신은 신체가 절단되지 않는 것을 상정한다. 그래서 귀신에 가깝고, 그래서 우리가 의사들을 생각할 때, 가장 온전한 지위의 사람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도 초심자, 첫사랑, 초대교회일 때는 같은 심정을 품는다. 나를 완전히 좋아하면서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실험으로 하나가 되어서는, 이상하게 모습도 변해서, 더이상 만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사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산천어 축제 같은,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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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는 한국말일까? 밧세바의 남편으로서, 다윗의 장군이기도 했던. 사람들은 말이 단단하고, 배움이, 지식이, 늘 전쟁을 상대로 해서, 단단해져 왔다. 그러나 우리아라는 한국말의 장군이 어째서 고대 이스라엘 땅에 생긴 것일까? 사람은 스스로 약하고, 관계가 단단하고, 건물이 단단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대신에 관계가 약할 수 있다. 관계가 약할 때, 빛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단단할 때, 빛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고, 그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 것이다 말할 수가 없다. 볼품 없는 자기가 단단해봤자, 그것은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한 포도원 주인 밖에 더되겠는가?
전세계는 씨실리아나, 국제도시 여수나 부산을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거의 전부가 산천어와 같다. 산천어의 뜻은, 책임을 지지 않는 언어의 짧은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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