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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부스지마유리코의 적나나한 일기 일편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6. 5. 21.

부스지마유리코의 적나나한 일기 일편을 보고








사람들은 정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것저것 잡학다식하고, 결국에는 최종의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와 같은 풀무질은 사실 정치만 해당하지 않는다. 문학도, 예술도, 종교도, 스포츠도, 학계도, 학개, 아모스도, 네안데르탈인도 다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진다고 노래했고, 우리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모른다. 아스카 야요이. 아스카 문명. 야요이 문명. 분명 두 문명 사이에서 그와 같은 흐름은 연속되었을 것이다. 옛날 일본 예술 승려가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예술은 파격이며, 우리의 마음은 그 안을 조용히 걷는다고 말이다. 그는 몇 개의 국보급 수묵화를 남겼는데, 그가 인기가 있다면, 그의 그림이 아직까지도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흐르고 있어서인 것이고, 인기가 없다면, 우리가 그와 같은 집중과 애국의 한 길을 가지 못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금각사를 지은 현대 소설가도 그런 말을 했다. 예술은 정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단도가 스스로의 작품 어디에서도 연속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사과 껍질을 깎아주지 못하고 했다. 그러니 주의주장에 작은 단정한 나와바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작가 자신이 알 수 없는 예술들의 힘으로써 생이 마감하고 만 것이다. 그의 중간까지, 내가 읽은 곳까지의 내용이 그랬다. 예술은 정치다. 정치가 서구처럼 훌륭하지 못해도, 예술은 정치고, 예술은 정치이니 만큼, 죽으러 가는 군인에게 멍울진 젓가슴에서 젓을 짜주는 것은 극진한 것이다. 그런 알 수 없는 중간 주장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냥 담백하게, 차라리 속시원한 중간 논리로써 정리하면 좋을 것이나, 그렇게 말하면 또다시 정치사상가 하라 켄이치의 말들이나 무한반복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는 것 같았다. 자연과 벗하고, 벗하고 자연하고, 사람하고 벗하고, 자연하고 벗하고 하자니까, 어쩌면 중간 정도에서부터는 잠이 든 작가 옆에서 그의 충직한 강아지가 대신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볼륨은 사랑이다. 동시에 볼륨은 정치이다. 일본은 컵이 한국보다 큰데, 그것은 정치적 사랑, 아이노 센시가 단 한 계단일지언정 한국보다 크고 자라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특화된 곳에, 그런 지상 전철을 타고, 증발을 하면, 그것도 생의 연속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단정한데, 그들의 작품들은 늘 작품 일상적인 것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두 가지의 길이 무한하게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상태로 지속이 된다. 차라리 지진나고, 경계하고, 훈련하고, 거리를 청소하고, 조성하고, 새로이 가꾸고, 일본만화 가쿠코, 그렇게 다시 지진나는 사이클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작품은 틈만 나면, 외국에 아첨하고, 런던하츠라고 하고, 톤네루즈라고 하고, 아라시라고 하고, 요코소 엔에이치케이하고, 만화방에 가고, 문이 닫히고 하는 것이다. 차라리 AV는 끝이 비누로써 분명하기 때문에 깨끗할 수가 있다. 우리의 의식은, 고통의 현현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덮밥을 많이 당하면, 논개가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했듯이, 예술 작품과, 깨끗한 거리와, 와따시와 바쇼와, 와따시와 논공행상와, AV의 아바는 그 두 가지를 비까번쩍하게 트랜스포메이션을 해서, 한국의 행선지의 무의식 같은, 상대적이고 동시에 절대적인 무에로 화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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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같은 이 드라마의 서장은, 위기 의식에서 촉발된 것이 분명하다. 얼마든지 정치 만화적으로, 일본의 그 수많은 지진의 지식인들, 작가들, 만화가들, 그렇게 자의식이 풍부한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그것 중에 하나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의 작품은 금세, 서울의 여의도를 덮는다. 일본의 하루키가 다만 규동이나 돈까스를 언급해도, 일본 어느 형사가 피의자 심문을 할 때, 먹을 것을 그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만 해도, 여의도 월가는 그만 잠식 당하고 만다. 한국은 매점매석이 기정사실화되고, 정치 기자는 발빠르게 친박인지 반박인지 따지고는, 늘 언제나 북한 뉴스만을 행하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사람들의 뇌를 피곤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상이다는 중지가 모아지는 것이다. 정치는 무엇인가? 정치는 있는 것이고, 여자나 아이들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오직 부정적인 논리 방식으로만 최적화된 정의이다. 정치적인 힘이란, 다른 어떤 데에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이고, 산발적인,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인 일을 하고 있는 다른 똑같은 정치적인 에이전트들이나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를 보면, 나는 그렇지 않다. 약간 도올 김용옥도 그와 같은 행보를 걷는다. 그것은 정말이지, 실제로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열정의 일악장과 같은 전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해가 저무는 시점의 철물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유곽하고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숙사를 좋아한다. 대학은 다니지 않고, 기숙사를 좋게 지어서, 약간의 내적인 의미가 통하는 그런 비학생을 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부하다가 철물을 만지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도 할 수 있다. 너무 내용이 복잡하고, 사람들은 사소한 행동에도 자신감과 전문성을 자랑해야 하는데, 금세 이야기의 호소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당한 튜닝 오토바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약간 절대적이지 않는가? 그리고 자가 정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정치라는 것은 바이쿠 쭈링구 같은 것일까? 아닐까? 열정의 진행을 보다 보면, 숨이 막힐 듯한 짧은 신속한 고음들의 연속에서,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는 정치일 뿐, 금각사와 같은, 거대 혈거인들의 바쁜 일과일 뿐, 하지만 이와 같은 드라마처럼, 그것이 일본 이전의 것과, 아니면 중간 과정에서의 변화와, 아니면 작품 하나 파일럿한 영 반기고 새로운 것으로서의, 아이들도, 여자들도 실질적으로, 일본 여가수 나카무라의 눈의 세포, 죽음의 한 신 같은, 발언권을 챙길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정치는 그렇다. 다들 모자라기 때문에, 다만 이 정도만 해도 사람들은 상대적인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저 멀리, 빌 에반스의 재즈처럼, 남지나해를 가로지르는 야마하 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