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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오늘 육룡이 나르샤, 삼봉 정도전의 죽음을 두고

by 마음대로다 2016. 3. 14.

오늘 육룡이 나르샤, 삼봉 정도전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이 불필요한 정밀 묘사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을 것 같다. 나는 소리만 듣고, 인터넷을 하면서, 가끔 보면서 그렇게 시청을 했었다. 사람은 분명 영향, 그러니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나, 영향, 분명히 영향을 받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게 바빴던 것은, 그것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우리는 상당한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오늘 육룡이 나르샤는, 여인의 슬픈 포지션을 두고, 그림자는, 그와 같은 불법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애타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과연 그것이 내게 영향을 주었고, 내게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공동경비구역을 자극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사병들이 죽어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온전히 전하는 방법은 되지 못하니 말이다. 금방 위정과 척사, 그러니까 도전과 응전, 수구와 침탈의 수레바퀴가 그려진다 하겠다. 정해진 인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길을 간다. 그래서 이방지가 놀라운 수학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룡이에서 이방지의 역할과 능력을 보아왔다. 그것을 분명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방원의 수행능력이다. 그것의 평가이다. 이방원은 무엇을 수행할 수 있는가? 사료에 의하면, 이방원은 문과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특별사항이 되는 것만큼, 이미 무과에도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가 그것을 몰랐을 리도 없고, 다만 액션의 재미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인물을 설정하였더니, 전체 스토리의 부담이 되는 지경이 된 것이고, 다만 해석이 아닌 그렇게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화사단의 새로운 단주가 그렇게 일본풍으로 죽어가는 것을 어쩌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일까? 혹은 검빛이 이중모음의 제로 바뀌는 찰라일까? 우리는 검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실학이라는 것도 그렇다. 성리학이 관념도 아니고, 목검도 아니고, 실학이 진검도 아닌 것이다. 실학은 과학과 비슷하고, 민주주의 담론을 많이 갖고 있고, 나름으로는 성리학의 핵심을 가져보려고 했고, 그림의 유행과도 함께 갔었다. 우리는 다만 김홍도의 그림만 가지고도, 실학의 기상을 꿈꾸고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형이상학적 실제에 걸쳐 죽임을 당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학은 천주교와도 연결이 되고, 아무런 학문적인 인과도 없이, 동학을 두고 시대적인 선구자가 되었었다. 사람들은 안견의 인왕제색도 같은 것도 실학의 그 무엇과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하였었다. 나는 그 모든 말들을 옳은 소리로써 들었고, 성리학이라는 것은 공리공돈으로 간주하였고, 들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본질적인 언급이나 인용에 대해서 늘 종교적인 심성이나 듣기가 이뤄졌었고, 다만 성리학적 실제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리라.

그림만 그려도 실학인 것이다. 그랬더니, 조선은 마침내 일본의 명치유신으로 인해서 점령 당하고 만 것이다. 무엇이, 무엇의 실제가, 무엇의 관촉점이 불타올라야지만, 근본적인 실제, 학생들을 원초적인 아르케에서부터 속이지 않는 실학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다만, 천주교들이라고 해서 순교한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천문학적 천장에 미치지 못하고, 심리적인 천장 아래서, 때로는 잘 익은 벼로, 때로는 그만큼만 뛰는 벼룩으로 지냈던 것이다. 그것의 촉매는 영원히 여자들이 될 것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만 놓고 보면, 오늘 했던 드라마의 내용만 놓고 보면, 여자들의 입장이, 능력이, 영향력이 극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었다. 여자들은 세상 미녀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입장과 세도, 호소력과 관제적인 제공이 훌륭하였었다. 남자들이 전부, 약간 무휼기가 있는 것과는 차별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인공이 없는 것 같았다. 드라마는 작가의 저녁 죽음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산하를 의미 없이 질주하다 보면 깨닫는 것이다. 학생일 때, 처음 학교 엠티의 속리산이 그렇게 좋았다. 날을 세다가 지쳐서, 도미토리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마음 속으로다가 그렇게 시크릿 갇은의 소품 같은 주제가 들리는 듯 했었다. 우리는 화사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심판을 전제하지 않고, 화사단으로만 질주하는 것이 있다. 자동차를 갖고, 어떻게 부딪히고, 매드맥스 하는 것으로는 꿈도 꾸지 않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섬진강의 한 다리 위에서 쉬었던 때가 있다. 다리를 두 다리로 걷고, 여기서도 사진 찍고, 저기서도 사진 찍고 했었다. 군내 버스가, 강 저쪽 도로에서부터 지나는 것을 만났었다. 나는 오토바이 사고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당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것은 속리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그렇게 심판과 화사단의 공동경비구역, 끝없는 정명석 같은 것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드라마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그러나 그것은 밤 별 빛나는 성균관 앞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심판이 없는 화사단의 삶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녀들의 칼솜씨는 다만 김홍도의 그림에서만 등장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서 발설하도록 오늘 그랬던 것일 수 있다. 반면에 심판만 있는 삶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도전이 그것의 형이상학적 최고의 자리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는 것은, 예쁜 여자와의 로맨스가 없는 사회철학자라는 것은 다만, 국정에 이용만 당할 뿐, 본질에 이르지 못하는, 이방원의 아프리오리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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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이름이 꽃잎 같다. 그에 비하면 내 이름 신현균은 차라리 대장군처럼 보인다. 남자 이름이 무슨 그런 꽃잎 같을까?


그것은 대게의 사람들이, 외모가 남자다운 사람들까지도, 실상은 눈앞의 권력에, 아첨에 능한 이방 같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전은 오직 형식으로만 보이고, 이방원은 오직 내용으로만 보인다. 엄밀한 의미에서, 둘 사이에 살인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다만 이방원이 사는 때까지 계속되고, 그가 죽으면 빛이 사라졌다가, 다시금 불이 켜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