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선입견과 견습생, 그리고 어깨 견에 about 이야기

by 마음대로다 2012. 12. 10.

선입견과 견습생, 그리고 어깨 견에 about 이야기

 

 

 

 

 

 

 

 

 

다른 훌륭한 사이트도 그렇겠지만, 내가 애용하는 음악사이트 벅스에는 내 앨범이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사이트에서 사이트로 담는 것을 말하는데, 내 컴퓨터로 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추가비용 없이 어디까지 내껀지스럽게 이용할 수가 있다. 오랜 만에 내 앨범으로 들어가서? 음악을 듣는데, 마음이 무척 고무되었다. 한국타이어. 질주하는 불타는 발바닥 키스. 젊은 나이에 벌써 안동댁이라고 불리기 전에 가야하는데, 시절은 종이비행기 접는 것처럼 선라이즈 선셋하고, 만나지 않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 아닌데도, 황동규의 이해할 수 없는 늘려쓰기 편지처럼, 점점 더 싫어하는 것으로서의 주자학적 판단 조급증으로다 넘어가려고 한다. 내 앨범의 긴축재정이 좋긴 하다. 그리고 거기다 놔두고, 리빙 더 라스베가스, 듣는 것도 좋은데, 소코마데에 담는 것도 여하한 느낌의 전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바네사 메이 록산나의 베일과, 음악들, 그리고 한국 영화 혈의누의 클래식 음악들, 그리고 폴모리아의 언덕을 넘는데, 마치 가는 곳마다 폴리스가 있는 것처럼, 아주 여러 곡들이다. 그리고 남이 미는 것이라고 정히 말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주의, 한효주가 바로 옆에서 슈베르트의 바하풍의 소품을 발견하여 내가 알려주는 것이다. 모멘츠 뮤지코 사번. 맞는 말인지. 처음 들을 때는 좋았으나, 다른 것들과 함께 다시 듣는데, 처음처럼 난초가 싱그럽지 않았다. 비싼 난을 사서, 보관하면, 처음에는 비싼 난처럼 보일 것이나, 점점 생명은 한 줄기 자기의 초라한 초나라의 현상으로 국한되지 않겠는가? 그래도 풍란이라고 한다면, 풍란은 란 중에 이름이 가장 좋은 것으로서, 형태도 약간 박진감이 있고, 슈베르트의 모멘츠 뮤지코와 비슷하다 하겠다. 그렇게 풍란 하나를 놔두고, 그것은 취미지행이 이미 발동한 것으로서, 젊을 때의 오케스트라를 상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짐노페디가 그렇게도 좋다. 이층에 풍란 하나를 놔두고, 농촌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보다 먼 행정구역에까지 여행하는 것이, 도시에서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무엇이 선험적 높은 풍란적 판단이 되는 것일까? 하하가 러닝맨에서 한효주를 밭다리 걸기하는 것이 비슷한 것일까? 우리가 이미 시나이산 문예적인 모세의 십계명 사태를 지났다고 한다면 말이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은 읽을 수가 없다. 화석화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은나라 때의 떡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것은 예술이다. 성질이 날카롭고 화를 잘내는 사람들을 가까운 듯 떨어뜨려 놓고 살게 하는 것은. 그리고 다수적이고, 주소지도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게이다. 하지만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예술은 관심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예술적 현상을 두고, 우리의 모든 몸을 던져 관심의 방정식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효주가 함께 트리를 점등식하고, 고속비행기처럼 슈베르트의 곡을 아는 척을 하고, 듣게끔 한다는 것은. 여자에게 지식이 있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그 코에 생명을 집어넣으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반칙과 같다. 엔니오건 앙드레건 내 것처럼 쓴다. 그것의 있음. 처음 발설하지만, 무슨 툴의 유명한 엘러지를 배경으로 던지면 무조건 다 명제가 된다. 명제란 이화여자대학교 같은 것. 지식에의 의지. 그것의 점진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아적인 제도에의 의지. 하지원은 모든 이항대립관계의 실제에 있어서, 탁구여왕처럼 군림했지만, 한 시간 정도, 여자가 할머니와 같은 연장만이라도 구걸하는 내면적 저지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함께 보고하지 않는 것이 미스인 것이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알통도 순전 영화 찍는다면서 선수처럼 생기고, 멈춰버린 여자가 좋은가? 힘은 보통의 사람과 같고, 같은 체격의, 심지어는, 심지호, 초등학생과 실랑이가 붙어서도 얻어터지는 체력의 여자가, 클래식처럼, 양철로 만든 새처럼, 때로는 앵글에 따라서는 신비로운 주술사의 칵테일을 마시고는, 늘, 싸우고 붙고 대학에서 배운 명제들을 내뱉는 것이 좋은가? 유식불교란 것은, 불교가 유식한 것인가? 사람을 한번 피식성하게 한 뒤에, <오직 식으로만> 하는 것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후자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그래놓고, 새벽 운동하고, 만팔천배하게 하고, 소림사로 일년에 한 번 캠프 유학을 다녀오게 한다면 범주적 갈등은 깨지겠지만, 운동하고, 또 운동하고, 저녁에 고기 먹고, 운동하고, 자고, 쉬고, 운동하고, 누군가 바깥에 나갔다가 걸려서 단체 기합 받고, 두뇌가 점점 전두엽, 그것의 카테고리와 레파토리, 맞는 법과 맞지 않는 법에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적으로 적응하는 것보다는 분명 주리론적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식칼을 쓸 때, 스포츠에서의 기술 같은 것을 연구하고, 때리기 보다는, 가치 함양이라는 것은 주장의 스피치와 그것을 듣는 함께 이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의 만토의 중심에 있다는 자의식이 스스로, 날개는 발을 덮고, 머리를 덮고, 허리를 덮는 것이 될 것이다. 남자의 자격에서 이번에도 합창대회에 참가를 했다. 전부를 보지 못했고, 지나고 나니 지금 글을 쓰게 될 정도가 되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음악의 사운드라는 뮤지컬 영화에서의 유명한 노래였다. 이름은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따라하는 것은, 진리의 제도적 소유가 아니라, 유식적 실제에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견습생을 영어로 어프렌티스라고 한다. 그렇게도 외웠지만, 시험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보자. 우리 두뇌의 유식. 이것을 달달 외웠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유식적 실제에 오를 확률이 높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을 알거나, 다른 단어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당황제까지 섞어 가면서 그것이 시험에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단어는 안다고 해도, 막스 베버도 생각하지 않거나, 마이스터 고교라고도 따라 연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기술은 식민지 기술이 될 수 있는 함정과 위험 앞에서, 도리어 그와 같은 위기가 주리론자 앞에서 견습생이라도 되고자 한다는 존재와 위치로서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자는 칼라가 아니다. 철학에서의 존재는 성기가 아니라 그림자일 때가 많다. 바네사 메이의 록산나스 베일을 보자. 마이스터 같은가? 어프렌티스 같은가? 처음에는 어프렌티스 같았으나, 미미, 욥기를 읽으면서 피아노를 미미 치는, 나중에는 질이나 양 양면에서 모두 마이스터 같지 않은가?

 

 

 

 

 

선입견이 만질 수 있는 것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은 인터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