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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병욱과 병욱의 집에서의 변질적인, 작가 이광수의 해피스테미리아적인 기질

by 마음대로다 2012. 12. 15.

병욱과 병욱의 집에서의 변질적인, 작가 이광수의 해피스테미리아적인 기질

 

 

 

 

 

 

 

 

자기가 건강하고, 주소와 하고자 하는 취지가 뚜렷하면, 찬바람이 칼날처럼 에이는 날씨 아침 일찍 도시를 활보하는 것만큼 기쁨이 밥통 베가 코스모폴리탄한 일이 없다. 밸런스이스에브리웨어. 어딘가에서 읽었고, 문장은 침투하며, 편의점에서 뉴밸런스 아침 영양식을 사먹는 것도 유리창에 비친 내 님의 얼굴만 같다. 물론 전자는 유적 판단이 개입해야 할 만큼의 좀비존재와, 숙취, 도리어 깨지지 않고 속만 검게 그을린 전구처럼 안티 에디슨한 구석을, 꼭 어느 현대 사상가들을 거론하지 않아도 되거나 알 수 있으며, 후자는 로고스 혹은 캐즘과 같아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 급속하게 상처가 낫는 듯한 영화 속의 표현기법을 단순히 자기 한 몸으로 경험하는 것 같게만 한다. 이광수는 정확하게 여기에서 우리 전통적인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기본적으로 역질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란 게 쉽지가 않다. 해피스테미리아적 반응이라는 것은 지금 임상의료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서, 어제 저녁에 본방사수로 본 어느 밀림의 동글잠 부족 출신의 의사가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한 것으로서, 한국과 일본에서 조금 사용하다가 서구 열강에서 쓰는 다른 단어로 대체가 되었다. 그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조금 더 지속되거나,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릴레이션쉽을 유지 추진하다가, 의식적이며 사회적인 심리적 반응에서는 조금도 체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다만 저장만 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더블 체크 같은 것으로서, 그것 또한 내면의 조개 안에서 서류 정리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파쇼적인 사회적 정치적 공무원적 권력을 얻자마자, 병욱의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려는 사람의 인상착의처럼 칼을 차고 다니기 좋아하고, 계집질을 하는데 돈을 물쓰듯 하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반응이 있고, 그것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작가의 층위에 오고나면, 작가적인 알파파와 문화와 순결주의적 경제의 한계 때문에, 그와 같은 욕동을 멸시하는 자로 페르소나를 갖게 되고, 욕망적 본질은 본질로서, 정신적 페르소나는 페르소나로 조금도 화해도 결합도 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동글잠 부족의 그 의사는 그것을 가리켜 그래서 해피스테미리아 반응이라고 불렀고, 단순한 양성적 단계의 반응과 지식인과 작가 그리고 작품에 내비치는 현상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론내리기를, 같은 것이라고 했고, 당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이광수는 이광수대로 글을 썼고, 의사들은 의사들끼리 외국 학술지를 구입하고 지들끼리 세미나도 했었다. 그 둘을 하나로 직관하는 사람은, 가난했던 시가지 풍경만 사진으로 봐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림 출신의 예술가나 학자가 간혹 나오는 편인데, 사람들의 냉대로 곧 사라지고, 대신에 프로이트라던지, 자끄 라깡이라던지, 마담이나 프라우들과 쉬퐁적이거나 프라우다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서바이벌오브휘티스트 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것과 얼추 비슷할 뿐 아니라, 보다 복잡한 말들을 많이 그들 출판적인 산업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소년에게는 매혹적인 볼륨이나, 생명의 고속주의자에게는 라이터 놔두고 불피우기 식의, 그렇다고 진리의 불꽃을 마침내 피우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단 하나의 논문은 출판의 마성에 휩쓸려가고, 바쁘고 신경쓸게 많은 한국과 일본의 정신과 의사들도 그런 잘나가는 의사들과 세미나하는 것을 좋아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