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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모토사이클은 클래식이고, 자동차는 데카당스한 것인가?

by 마음대로다 2012. 12. 21.

모토사이클은 클래식이고, 자동차는 데카당스한 것인가?

 

 

 

 

 

 

 

 

 

우리의 고전은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황희도 그렇고, 이이도 그렇다. 그 둘을 읽다보면, 기독교적인 냄새가 난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베토벤적인 운명이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단정하게 소리지르면서 베토벤을 마치 아랍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조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근대적인 조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진공관을 갖고 있다. 클래식이 조여오면 올수록에 그 한 반응 밖에 없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의 링댕동이라던지 로꾸거라던지 하는 것들은 대단히 단국대 국문학과스럽다는 느낌이 있다. 일과 놀이. 아르바이트 앤 플레이먼트? 다양하게 듣고 말하다가 링댕동하는 재치. 그러나 일본은 또한 나아가지만, 그들의 착함과 철학은 아무런 약속함이 없다. 이상한 것을 하려다가 말려는 정책 일관성 밖에는, 미치도록 고요한 정중동의 산케이. 사람들은 마이니치 마이니치 살아야 한다지만, 저도 모르는, 전자동적인, 기억의 카랴안적인 아프리카 상태의 전치에 츄파츠 같은 기술만 늘 뿐이지, 헤겔적인 아우프헤붕은 다시 말하지만 기약할 수가 없다. 그것들이 도리어, 유사베토벤적인 테리토리를 함께 직관하면서 갖게 되는, 얻게 되는, 얻고 싶지 않은 바로크적인 클래식의 원주처럼 느껴진다. 비는 선녀들이 먹다가 버리는 굴처럼 떨어진다. 누군가는 용케 진주 하나를 얻는다지만, 굴이 크기를 달리해서 살바도르 달리의 독재적 세계 안에서 뺨싸구를 계속해서 치는. 무수하게, 홍콩까지 보이는 듯한 칼레이도스코프적으로, 내 있는 곳의 창을 부딪히는, 이 무수한 굴들. 피굴들.

 

카이사르는 일본을 예단했던 것일까? 그의 전쟁기나 내전기는 그렇게 기독교가 오리엔트하니까, 로마는 라티누스 라치오하는 것이다는 분쟁 통에 선생을 거저 얻기 식의 내용이 결코 아니다. 될 수가 없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장군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하는 짓은 코리안스 라치오한다 하겠다. 라오스. 그러나 그 말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은, 학자가 신유의 은사로 가족 중에 한 명이 감기에 나은 적이 있는 것을,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전쟁기에서 아무런 기사와 이적이 전개되지 않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그리 판단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전쟁하는 것이 무슨 이성적인 일이 되겠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와, 관계와, 거리와 일치한다 하겠다. 클래식은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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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은 철학이 아니다. 클래식은 굴과 가깝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아침에 깻잎 김치를 먹고, 점심을 고추장 비빔 도시락을 먹고, 저녁에 집에서 된장 찌개 먹고, 밤이 깊도록 영어 공부를 하면, 한국 사람이겠는가? 미국 사람이겠는가? 캔유스피킹잉글뤼시? 에스 아이캔. 이것은 정말 클래식하다. 그 절망. 그러나 철학이 아니다. 이즈잇미유아루킹포? 헬로우?.......

 

 

 

 

 

 

 

 

 

 

오토바이는, 모토사이클은 클래식인가? 우리는 그와 같은 등치에 만점을 주고 싶다. 김연아도 좋고, 아사다 마오도 좋다. 그들은 남자들일 수 있다. 클래식이 되지 않는 애타는 마음은, 남자들을 소녀들의 맹자 상태로 유추프레카치아자차카타파하하는 길도 얼마든지 열어놓는다. 소녀들은 집안을 깨끗하게 하고, 천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전남자로서, 옷도 없고, 집안이 말도 못할 정도로 더럽다. 물론 여자들이 지하여장군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이나, 마치 발달한 성기처럼, 성기운명론, 여자들은 잘 치우고, 빨랫감을 미루지 않고, 요리를 하는 것에 하나님의 구속하심이 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남자라는 소리가 아니다. 시라소니.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라는 회의 석상에서 말은, 아사다 마오가 남자라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논쟁하며, 논쟁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하는 것과 소용 면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논쟁이라는 것은 디스쿠스, 담론과도 얼추 비슷하다. 아무런 정의가 엄밀하지 않다. 그것은 클래시컬한 것이다. 성균관이라는 것도, 다만 먹기만 좋아하는 코끼리를 처치불능하여 다시 돌려주었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처럼, 코끼리 덩어리들일 수 있는 것이다. 전쟁기는 공중을 가르는, 달빛 가르기처럼, 그것의 존재에 슬라이딩 도어즈하는 내용 초장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로마 장수 카이사르가 프랑스로 전쟁을 하러가는데, 우리는 팍스 로마나라는 선입견에 비추어, 사람들이 매우 우유부단하고, 용맹하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귀족들과 다른 자제들이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카이사르는, 자기가 카이사르라면서, 담담하게 적고 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영어로 서플리멘터리. 우리는 카이사르가 존재론에 육박하는 고전을 남기면, 그들마저 동반상승하는 것을 클래시컬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공주감.......

 

 

 

 

 

클래식은 사람을 뼈만 남게 하고, 국문학을 참담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클래식한 의지를 갖다가, 니힐리즘을 갖던지 데카당스를 갖던지 하면 좋을 것이다. 국문학은 이런 한가위 같은 인간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처음부터 데카당스를 갖고 출발하는 시계방의 알람시계들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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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모토사이클은 돈에서부터까지 이야기를 뿌리내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