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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한국 그리고 주인공적 의지의 허위의식과 찰라적인 진심성이들

by 마음대로다 2012. 12. 23.

한국 그리고 주인공적 의지의 허위의식과 찰라적인 진심성이들

 

 

 

 

 

 

 

원칙적으로만 보면, 기독교인이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야 하며, 사회성도, 전도도 잘하고, 프랭키적 성가심의 사회적 고려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옷을 잘 입는, 몸매가 좋은 여자를 학생들이 다 쳐다보고, 얼토당토 않는 자기네 교수가 그 여자와 사귄다고 하는 소문을 자기 욕망의 투사로다가 퍼뜨리기도 하는 성리학적 고속도로와 매치가 된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것들을 읽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들의 비쥬얼이 근처의 모든 문명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가장 본문에 일치하는 고등학교 공부를 하는 학생이 서울대 국문학과에 지망해서 수석은 아닐지라도 그렇지 않아도 저렴한 등록금 면제에다가 장학금도 받는 것을 보는 선생은 그날 교통 사고로 사츠진 지켄 죽어도 좋은 것이다. 마음이 편하고, 불국사에서 선배들이 너의 할 일을 다했다지만 우리가 죽인 것은 아니다면서 마중을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느낌.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양날의 칼과 같다. 인간은 흙과 달라서, 아무리 이상한 조상일지라도 염려하면, 팔과 다리의 힘이 배가가 된다. 옆에서 산 채로 떠드는 영원한 운명의 것들은 코소보 반기문과 같다 하겠다. 그래서 시골과 연계가 된 사람들이 여러 토속적인 음식을 먹이는 것과, 피자와 닭튀김, 술과 맥주와, 폭탄주와, 안반기문적인 눈깔 수십개들과 다니는 것은 마음가짐의 결과가 천양지차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약간 재치와 창의적인 짓궂은 말을 하는 것을 두고, 사람의 보이지 않는 형상을 입는 사람은 비너스처럼 되지만, 그 짓궂은 말을 비슷하게 해서 확대재생산하는 것들은 라오콘 같이 되는 것이다. 정치인인지 걸그룹인지 모르는 개튀김 같은 것들이 그리스 조각상 중에 노예의 것을 흉내내는 것도 비슷한 아카데미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단 두 컷만 있으면 된다. 얼떨 결에 우리는 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밤 깊도록 공부하고, 사람들이 워낙에 많으니 해찰하는 사람이 없고, 학생들이 대개 취직 공부를 하는 유사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선생과의 섹스와 유사한 도재 관계가 없대도 자기의 독서가 얼마만한 탑이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박근혜 타임. 그것은 정말이지, 박근혜 타임이라고 부를 만한 도서관의 풍경이다. 누군지 모르나, 학생 운동은 사회 권력까지 이어진 것 같았고, 문기완이라던지, 이창동이라던지, 남영남이, 복거일이, 그 만화방과 같은 연등 불빛들, 그것들이 부정적인 비본질적인 것이지만, 손가락들만 좀비처럼 선을 보다 가깝게 가리키고 있으니, 순진하고 순전한 내 친구 이름인 윤순진 같은 학생들은 취직과 뿌띠와 고등학교 중간고사와 아무런 질적인 차이가 없는 포지션들 사이에서 헤겔을 읽고, 맑스를 읽고, 철학과생들은 마치 한신대에 신학과가 있는 것처럼 저먼아이디얼러지를 읽고는 저녁에 집으로 갔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의 마티스, 야만과, 역설적인 모닝이 대학원의 대체입법, 논문의 알 수 없는 족보식의 아이템 잡기와, 서울대 아무개 훌륭한 졸업과 전임 강사가 못되었던 여자 영문학 박사는 속물 자본주의라는 말과 함께 속물 맑스주의라는 말을 그렇게도, 아주 조개종식으로다가 했었다. 그것은 엠비벨런스한 것이다. 우리가 환자가 생겼을 경우, 앰뷸런스를 부르지 않는가? 우리의 관념은, 그것이 비너스의 탄생이 되지 않으면 수천 수만의 학생들이 조개구이의 맛있는 제한적인 직접적 관계의 속물이나 양산한다는 막가파식 표현주의였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박정희 정권이라는 말은 탈색되고, 덧붙인 바의 것으로서의 신화가 되었다. 오랑캐를 잡았는데, 목이 잘려 죽는 것이 아니라, 그를 먼저 시해하려는 화살을 막아주려고 사람들이 덮치는 바람에 깔려죽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개그콘서트에 나온 내용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서울대 국문학과나 영문학과, 독일철학과를 아침 일찍 사람 별로 없을 때에 올라가는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같은 것이다. 그것의 발성학적 의미에서의 입체파. 영어로는 임페리얼리즘. 단어는 스즈키나 위스키 같고, 우리는 그것들을 가끔 빨아먹는 패잔병들 같다. 육사 생도들이 싹수가 이처럼 노란데, 나머지는 무한한 초코파이주의자들의 대지일 뿐인데, 무슨 군대 규율이 남아나겠는가? 그것의 하나회라고, 생기나 한 번 빈 들의 메타몰포시스적인 측면에서 성공한다면, 그것의 성공을 어떤 하늘이 알아주겠는가? 천지현황이 알아주겠는가? 우리는 회전마차처럼, 포장마차처럼 회전하면서, 숱하게 하이를 겪었다가 추락하는 원심성이들 같다. 뜻은 잘모르는 말이지만, 화용으로는 접근이 된다. 한국 전체가 육사 생도들이다. 보라. 호라. 무슨 외국의, 중국의, 일본의 책과 글들이 나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어서 불규칙을 겪지만, 그들은 돈이 있어도 우리에게 관심이 많고, 권력이 많아도 어딘지 모르게 한국에서 헐벗은 춤을 추려고 한다. 우리는 고통 중의 내 친구들이 수학적인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육체의 계급의식적인 논개적인 타임을 호시탐탐 그래서 타임? 계산하면서 그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고 말이다. 나도 그런 말을 무수하게 들었다. 그들은 대개 날씨로 말하고, 날씨로 변호하며, 기상청의 무뇌적인 상태를 서울 방배동의 날씨를 인터넷 사이트의 전면에 내새우는 기교적으로다가 함께 변호한다. 누구를 변호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의 재산? 그들의 지식? 그들의 국가? 막연하며, 모호하고, 불문법 같고, 애새끼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 같다. 현악사중주의 박근혜적인 타임은 기적과 같은 것으로서, 폴리탄들은 처음에는 한국은 기승전결 허구한 날 진보와 비판 세력이 대학을 장악한다 하였고, 일본이나 미국은 그로부터 자유롭다고 선망하였었다. 그것은 인정한다. 그들 선배는 사납고, 어느 때는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보다 문화적인 안목이 없었고, 그것을 비판적인 입장으로 변호하였었다. 누가 영화에서는 주인공들 같은가? 영화는 다국적이고, 유엔 평화유지군 같으며, 소말리아 같다. 주인공은, 그것의 아름다운 비너스는, 시간이 끝나면 늘 차사고를 당하는 것 같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아주 극미량의 나노한 냄새를 맡을 수 있듯이, 빈번한 차사고는 다음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뻔뻔하고, 빽빽하며, 유다처럼 안하무인에다가, 막부들이다. 도덕에 늘 쫓기고, 끊임없이 변호하며, 변신들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러니 외국 영화는 없는 것인 것이다. 그들이 불사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영화가 빽빽하다는 말이다. 지글지글 연탄불 위에서 맛있게 먹어대던, 아무개 교수의 빈번한 속물 맑스주의라는 말도, 때에 따라서는 대단히 급진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화석화된 서양의 대학들과, 삼세계들의 지능적 한계가 나름으로는 직관될 수가 있다. 종교와 예술과 철학의 높은 탑 아래서, 아티카 앤타티카 아무 것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