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와 작품적 이격의 시간: 신우선과 다보탑의 기차 안에서의 박근혜적 모습
왠지 마음이 프렌치하다. 영문학적 센치와는 조금 다르다. 엄격히 말하면 영문학적 센치도 없는 편이다. 그러는 편이 낫다. 그나마 대륙에 프렌치가 있다면, 영국에도 프렌치가 있고, 프랑스에서 놀러온 두 청년이 항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를 점령하고, 옷을 잘 다려입고, 백인 여자들과 델리에서부터 봄베이 항구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은 프렌치한 것일까? 스티븐슨은? 그와 같은 퀴즈는 거의 모든 잘된 영화를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 헤테로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양식으로서, 배가 부르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초장에 엠마뉴엘이 아름다운 맨션에서 시스루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태국에 철로 만든 거대한 새를 타고 내린 것도 프렌치하다. 선민사상이나 백인우월주의 같은 것은 의식의 신체와 센치에 이르면, 금방 지워지고, 프렌치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의식이 없는 채로 지낸 것일까? 학생 운동이 스즈키 바이크처럼 사라졌다가, 되살아난대도 스즈키 블루처럼 그저그런 것은, 아니 그렇다하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남기고, 박근혜처럼 영영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맑스 계열의 계급 의식에서 분리해서, 역사 의식, 사회 의식과 결합을 하였다. 아무래도 보수 세력들은 의식이 없이, 기계 장치도 없이, 테일러리즘으로다가 살기 때문이다. 묘한. 아주 묘한. 이광수의 내면적 선각자적 다이아그램이 그려진다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에서도 없고, 흙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강팍한 처음 장편 소설, 연재 소설, 무정에서나 무정란이 깨지듯이 드러난다 하겠다. 우리의 학생들은 대학생 때에 더욱, 의식화라는 말에 겸손해 했고, 사회 전반에 대한 스케치 능력, 심지어는 스스로 말하면서 색을 덧붙이는 능력을 키우고 경쟁하고 하였다. 인문학생은 모두 비판 논리를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시스템으로서 배우고 익혔다. 그래서, 학생 운동을 하는 것들이 보고서 작성을 잘하는 '박근혜 타임'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환희였다. 대학생은 실천과 더불어서, 기차 위에서의 만남이고, 이동식 학교이며, 선생과 학생 간의 무거운 도제적인 성격이 아니라, 선배와 후배라는 단순히 배가 조금 더 나오거나 날씬한 것의 차이로 담론을 주고 받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몇 번 두들겨 팼으나, 인상이 강렬해서, 대학 때에는 점처럼 작아지고,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책의 모습보다도 작아져 간다. 취직은 사회적 주체의 첩경이다.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철학적, 심지어는 종교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타임, 박근혜 타임은 그것이 아주 싱그러운 향기처럼, 자기 향기, 주변 향기, 늘 있었지만 새롭게 맡아지는 향기처럼, 취직과 아카데미, 이것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저것이 적당히 거리두기 되는 대학 졸업반의 능숙한 말주변에서, 다만 사회적 주체만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주체, 스피치, 그리고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주체, 셀링, 그것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광수는 신우선처럼, 안타깝게, 그것의 행복한 다보탑을 지켜보았고, 도저히 그 안으로다가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국문학과에, 그것도 서울대에, 학생들이 들어가면 그날 죽어도 좋지 않겠는가? 누가 작심삼일이라고 하겠으며, 일장춘몽이라고 하겠는가? 학교로 달려가고, 일부로 걸어서 전철역에서부터 언덕을 넘고, 다른 때에는 반대편에서도 오고, 심지어는 관악산을 넘어서도 갈 것이다. 옆에서 친구가, 등산복을 하고 국문학 입문 시간에 책을 펴는 친구를 보고, 등산 가느냐 하면, 갖다 온다고 하지 않겠는가? 티보가의 사람들을 아주 조금 보았지만, 거기에 프렌치가 있다. 거기서부터는 재미가 없다. 마른 것도 아니고, 식상한 것도 아니며, 싫은 것도 아니다. 더 들어간다는 표현 밖에 없고, 자기는 더 들어간다고 해도, 마땅히 더 설명할 것이 없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너무 쉽게 쓰여진 시나, 일본인 교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국문학과생은 그것의 임계점을, 알피엠의 레드존을 보다 일찍 경험한다 하겠다.-------- 일반 과학에서의 강의는 선생이 학생과 거울이 하나이다. 사람이 철과 전선, 약품과 미생물로 구성되어 있는가? 교수는 차분하고, 둘은 아주 가볍게 인간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그러나 국문학은, 문학의 가장 선명한 의식은, 늘 이광수보다 못한 선생의 말주변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자 고문관인 셈이다. 신우선이 영채와 병욱 형식이 나란히 있는 것에 함께 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자기는 똑똑하다는 것. 희경의 무리들이 기차에 올라타지 못했는데, 선형도 홀로 있는데, 자기가 다보탑의 커피 전문점에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이런 설명..... 그것이 사람들에게 가납이 되겠는가?
마음이 아주 프렌치한 것은 뿌띠한 것이다. 사회적 소용이 사용가치면에서 양적으로나마 화끈한 것도 아니다. 아주 목포 같고, 부산 같고, 서울 같다. 우리는 정지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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