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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by 마음대로다 2016. 7. 19.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으로 난제중에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말은 계급을 갖고 있고, 단어까지도, 그것의 의미적인 소통은 다만 한 사람의 부귀영화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주자는 그런 것들의 수학 같은 것이다. 발화자가 훌륭한 상대자를 찾지 못해도,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그것의 사상으로 인해서, 전체 인류가 지금까지, 스콜라를 유지하고 있고, 민간인들까지도 잘 모르는 고집과 감각으로서의 콜라를 먹는 것이다. 콜라는 민주정도 아니고, 예술지상주의도 아니고, 일본의 아스카 문명도 아니다. 야요이.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저런 미각의 뷔페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그 어떤 단순함에 대한 직관 같은 것을 갖고 있다. 콜라가 간장을 닮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콜라를 먹겠는가? 새우 튀김을 간장에 찍어먹겠는가? 그것은 다만 부먹이나 찍먹을, 탕수육,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가 그것을 고민하겠는가? 새우 튀김을 간장에 찍어먹고, 콜라를 한잔 마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콜라를 갖고 그렇게 기뻐한다는 것은, 다만 콜라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의 형성과, 그것의 영향 같은 것을 배울 때, 우리는 굉장히 그윽해지고, 난망해지고, 우리 삶은 갑자기 공중에 뜬 것 같고, 염세주의나, 니힐리즘, 절충주의 같은 것에 빠질, 그것에 떨어질 유혹 같은 것을 많이 갖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헬레니즘적인 세계관이 발견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주장은 매우 생경하고, 안타깝지만, 완전히 버스에서 내리게 하고, 다른 학생들만 집에 데려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더욱 잠 못 이루게 하고, 사람들을 정말이지 저녁 불빛 깊은 곳 속으로, 완전히 실존주의적인 무화를 경험하게끔 한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는 기독교보다도, 철학, 그러나 후대의 독일 철학을 영향 받지 못하고, 그래서 겨우 영향 받고, 비빌 수 있는 언덕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것들의 저작에 비추어 보면, 너무 그 모습과 사람들이 당하는 상처가, 우리들의 장보고, 콜롬비아의 보고타, 우주왕복선 콜럼비아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웅장하고, 도저히 셰익스피어의 핵심은, 동시대의 극작가 이름 같이만, 크리스토퍼 말로위 정도로만 동어반복을 하고 싶은 유혹을 갖게 한다. 셰익스피어 이전도 없고, 셰익스피어 이후도 없다. 어쩌면 순전히 자연인인 그가, 영국 사람들을 전부 구원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제국주의의 악명까지를 도모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든지 제주도. 아는 것 하나 없이, 스콜라 철학에 대해서도. 다만 콜라 하나만 들고, 꼬마아이가, 그처럼 불쌍함으로만 피자를 계속해서 당하는. 그와 같은 영원적인 객체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도리어 성경 같은 현대성을 달성을 하니까, 우리 인류의 전체 삶이 달랐졌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었던 남미에, 소고기들이 많이 생기고, 고기 값이 채소 값보다 싼 지역이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이 생기고, 계속해서 철학이 생기고, 프랑스에도 실존 철학이, 아주 피똥 싸면서 문학이 생겼는지 모른다. 헬레니즘적인 절충주의. 대체 그것의 대표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영향은 높이가 있어야 받는 것인데, 우리들이 높이가 없다보니까, 그와 같은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한국어를 해야 하는가? 섹스는 피해야 하는가? 아니면, 섹스를 꽃피워야 하는가? 정말이지 섹스투스,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것 같다. 언제나 로미오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고, 줄리엣도 따라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면 짝사랑하던 다른 로미오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시원한 콜라를 마시고 싶은 것만큼이나, 원화들에게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높은지, 낮은지, 지배력이 있는지, 없는지, 또 하나의 원화들을 훈련시키는 교범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 도저히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대립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비틀즈처럼, 쥬스가 남발되기 시작하고, 다시 담을 수 없는 원화들의 섹스가, 훌륭한 문화와 함께, 유럽 전역에 만연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연극이라는 것은 읽는 것도 어렵고, 감정의 아프리오리를 자기 것처럼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증거로써 제시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운명 공동체 같은. 성적 자유가 허락되는 짚시 공동체 같은 것들이 요청되었을 것이고, 인구수를 담당하는 세력이 그것을 마침내 용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영국을 원화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죽을 때까지 섹스하고, 셰익스피어 연극을 사람들에게 상연하는, 우드스탁, 귀여운 딱다구리의 나라라고 알고 있다. 극작가가 죽은 날로부터, 백년까지는 자연적인 힘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 셰익스피어도 시대적인 글쓰기를 하였을 것이니까. 그리고 삼백년까지도, 그것이 가진 고전의 높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신성일이라든지, 윤정희, 김영란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아주 질색해 하는 것처럼, 헤겔이 나오고, 다른 기라성과 같은 극작가들이나 소설가들이 다름 아닌 영국에 나오고 나니까,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다들 장단점이 있다. 존만한 의식의 흐름. 소화기가 쏘세지처럼 보인다는, 버지니아 울프가 그렇게 실제 별 볼 일이 없어도, 아이들이 뽀로로를 보지 않으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는데, 그런 식의 여권 신장 같은, 우산장 같은, 그와 같은 택배 아저씨와의 밀웜 관계, 그런 조용한 세계관은 충분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옥스포드. 그것이 리인지, 기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정도만 되어도, 사람들은 동방 유리왕의 유일한 후손 같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섹스를 하란지 말란지 몰라서, 일단 하고 보는, 그래서 도저히 다시 그것의 물질이 마르지 못하는, 원화들의 단독적인 세계관에서 건져 올려질 수는 있었던 것이다. 오직 그것을 위해서, 산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팽창하고, 다른 식의 읽을거리가 계속해서 확대재생산되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아니라고만 생각하는가? 사람이 신념과 문건을 가지고, 집단으로 섹스하다가 죽는 것이 어디 쉬운 에피소드인가? 영국이 서둘러, 다른 후대 문학을 발전시킨 이유는, 독일어도, 프랑스어도, 스페인어도, 갈수록 훌륭해졌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한국어를 해야하는가? 과연 셰익스피어를 조선의 역사라고 편입시킬 수 있겠는가? 두번째는 모르겠으나, 세번째 감동은 덧없고, 밀튼은 재미가 없다. 사람들이 멍청하게, 그것들끼리도 연락하지 않는 것들을, 훌륭한 관계라고 계속해서 높은 곳에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언어를 갖고 있다고 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쟁에서 지령을 받는 것처럼, 일사분란하여서, 승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 뿐이다. 한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다만 셰익스피어만 좋아하여도, 너무나도 영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세상 모든 알리야적인 유혹을 견대내고, 그들을 잘 다스리고, 하늘이 내보이게 기둥들을 훌륭하게 세우는, 철학까지도 잘한다고 하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살아서 프리드리히 헤겔이 되었다고 하는, 엄청난 현대 정신의 정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한국문학자이고, 갈색 빛으로 반짝이는 남미 티와나쿠 유적의 바위들, 참으로 위대한 고향에 다시 오른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