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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드라마에 대한 애증과 범민주적 문명 사회에서의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초적인 지식소

by 마음대로다 2016. 11. 7.

드라마에 대한 애증과 범민주적 문명 사회에서의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초적인 지식소






우리는 드라마에게 애증을 느낀다. 그것은 여자와 같다. 그것의 굴곡은 성모마리아, 그러니까 남자와 같다. 물론 남자라고 다 남자가 아니다. 백번 김구. 그러니까 김을 백번 구워야, 겨우 구워지는, 신비로운 아미산의 김이 하나 있는데, 무당산, 우리가 오방색 옷을 입고, 그렇게 구워서 먹으면 맛이 있는. 그렇게 해서 만나는 남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여자는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남자는 상상이 된다. 어째서일까? 남자는 싸우쓰. 써던. 혹은 썬더. 제임스 라스트의 베토벤 로망스도 사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자는 결여의 속성을 갖고 있고, 그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경쟁할 때, 사람들에게 비로소 죄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자들은 늘 그것만 해도 된다. 그러면 남자들이 자기들 지식이나 노동의 신처럼, 데리고 가서, 신전을 차려준다. 그것은 위만 조선과 같고,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것만 해도 되는 기자 조선과 같다. 사람들은 늘 잘한다. 못하는 사람은 사실 사람이 아니다. 못하는 사람도 잘하고 싶어한다. 잘하는 사람 옆에서, 못하는 사람도 힘을 내어본다. 여자도 그렇다. 여자도 오래봐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여자도 잘하는 남자 옆에서 일을 잘하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싸우쓰. 그리고 코리안. 템포를 별로 말해주는 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품속, 여자는 원래 체구가 작은데, 품속이라면 남자의 품속이 되겠으나, 알 수 없는 화목제의 품속과 권력에서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알 수가 알 수가 없어요 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성장의 나이에서, 직관과 이성적, 그리고 친구들과의 스포츠가 정확히 내옆슛, 혹은 삼점슛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억지가 자라나고, 억지가 억지를 낳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틀린 말은 아닌, 억지가 억지를 낳고, 밤하늘을 보면서, 억지가 억지를 낳고, 오직 노동만이 산처럼, 바다처럼, 남녘 남처럼, 순수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드라마는 무엇일까? 억지가 억지를 낳는 화목제의 품속 같은 것일까? 아닐까? 가요무대가 이렇게 재밌다고들 하는데, 끝에 잠깐 보는데, 사회 보는 사람이 자기가 시청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건강이라고 멘트를 날리는 것이었다. 딱히 특별할 것은 없지만, 내가 마지막 곡으로 십오야는 그렇다고, 얼른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것 같은 생동하는 취미의 힘으로써 말하자면, 도리어 좋게 느껴진다 하겠다. 건강했을 때, 그것은 참으로 대위법과 같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철봉 사이를 오갔고, 계단에 철봉이 있던. 지금은 만나 볼 수 없는 노출 콘크리트 방식. 동시에 농사일을 하는 가족들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도시로 출격을 하면, 모두가 발벗고 나서서 길을 가르쳐 주고, 행여 누군가 서울역에서 처음 서울 온 사람을 사기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사연은,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써, 두 가지 방향의 힘을 사람들에게 미쳤던 것이다. 도시의 삭막함. 속이는 것이 처음 만나는 문명의 얼굴이라는 것. 코베아라는 것. 깍쟁이라는 것. 그러나 우리가 조심히 보면, 안 그럴려고 하는 지방 사람,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서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작은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좁은 문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범죄나 악을 저지르려고 해도, 그것은 범죄인에게조차 좁은 문이자, 매우 비좁은 도시가스 소로길이기 때문이다. 대게가 그렇게 분열이 된다. 큰 길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울에 많았다. 지방에 있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런데 그렇게 고속도로는 전라남북도, 인근 경상도에 있는 것 같다. 고속도로가 그냥 달리는 것이면 진정 물자체에 불과할 것이니......) 드라마가 무엇일까? 대체. 그것은 역사의 종언을, 후쿠야마, 어떻게 고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는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간혹 보이는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에나 있고, 늘 언제나 공포영화적인 단일적 자신감과 함께 있는 것일까? 지식이 있을 때 자신감이 있고, 자신감이 있을 때 지식이 있다는 원리에 따라, 그것은 늘 언제나 쓴웃음과 함께, 폭소를 자아낸다. 전지구적인 지능의 한계에 우리는 봉착할 수 있다. 문명이 문명으로 구성되기 위한 제일원리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을 것이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한 흐름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거대하고, 거대하다 보니, 이미 만연해 있다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와 함께 세련되고, 때로는 나를 닮아 아름답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경쟁이고, 내게 여자가 없지만, 그와 같은 가공의 공간에 대한 거짓말은 늘 사람들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보니까, 드라마가 사람들의 프라임을 향해 돌진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원대로 다 된다면, 우리나라는 드라마 킹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영화에서 낙오하고, 한국은 일렉트리시티, 에프엑스 떨어지지 않고 있다. 사람은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다 죽는다 하는 삼단논법에 따라, 우리는 애국의 한길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이다. 조개 껍질. 구름이라는 외국어, 그 중에 영어에서조차 만나지 못하는 한국말을, 구름 위를 말을 타고 지나는 이육사의 초인을 그래서 보았다고 하는 여행객들과 스튜어디스가 우리들 중에 요사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