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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임당, 빛의 일기 2편까지: 안타까운 소재주의적 절대주의, 그것의 가족주의적 텔레토비........

by 마음대로다 2017. 1. 28.

사임당, 빛의 일기 2편까지: 안타까운 소재주의적 절대주의, 그것의 가족주의적 텔레토비........






우리가 관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연합. 누군가 단풍이 장관인 학교를 배경으로, 학술 소모임을 명칭하여, 유럽연합이라고 하고, 그 중 한 명이 프랑스를 맡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하면, 얼마나 그것의 당참과, 허황됨과, 문학을 조금 공부하여 그것의 국가 전체를 아는 것의 운명과, 아무튼 그런 것을 아울러서 즐겁고 놀랍다고 박수를 치겠는가? 우리는 꿈꾼다. 그와 같은 거대 코끼리, 대학에서 기적처럼 오직 즐거움만 쌈밥 먹고 다니는. 이 드라마는, 그런 독특한 개성을 파고드는 야만이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야만이나, 아마추어의 야만, 혹은 음악적이고 미술주의적인 미니멀리즘 같은 것이 아니다. 주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야만 같은 느낌 밖에 없다. 하지만, 고백도, 원리도 없지 않아서, 주자의 약점을 파고드면, 되려 당한다고 하는, 드라마 초장 일이편의 숨가쁜 장면 전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과, 당함과, 소재주의적 천진난만함으로, 도대체 무엇을 규명하기 위해서, 이영애라고 하는 남태평양 피지의 미인을, 우리들의 한국어적 원죄로서의 '얼굴'에서 짜내고자 하는가? 우리는 항목적 존재이고, 죽부인이 그것을 먼저 말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대나무 냄새와, 복잡한 말의 연관과는 천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 나의 항목적 존재라는 말을 도리어 높게 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정말이지 항목적 존재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항목은 절대적이다. 그것의 길이. 그것의 재는 행위. 툼레이더의 예쁜 배우가, 항목을 그네 타면서, 무시무시한 사면존재에게 도전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면존재이지만, 반드시 항목적 존재로서 그네 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시야는 생각보다 좁고, 걱정까지 끼쳐 있다면, 더더욱 어두운 도로의 드문드문한 가로등 아래를 질주하는 자동차 같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어렸을 때는 종횡사회를 보았고, 내 한창 작가 시절에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보았다. 또한 나중에는 툼 레이더를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 새로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남미의 선키스트 같은, 태양의 한껏 아름다운 상징 그림을 비춰주지 않는 것이다. 그 어린 사람들에게, 종횡사회를 보고,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보고, 툼레이더는 그나마 액션물이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 강압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종횡사회가 미술 영화도 아니었고, 마르셀의 여름 또한 그러하며, 세상의 모든 아침이 미술 영화도 아니고, 그것의 주제라는 것은, 우리가 음악적 도시를 살면서, 숨이 끊어질 듯한 단 하나의 발라드로 침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역행하는, 존재의 폭력 같은, 그레서 아마데우스가 우리를 넓게 죽게 하며, 동시에 넓게 다시 살게 하는 명작이 아닐 수 없다. 내 어렸을 때는,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은 모두, 아마데우스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며, 우리들의 영화는, 미국에서 그것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에 걸쳐, 선의 경쟁이 있을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포토샵과, 이것은 무슨 매직 아이 같은, 그림은 하나인데, 스스로 생각하여서 필름의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이런 식의 주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별로 미술 영화 만드는 것에, 음악, 재주가 없는 한국 사람들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겠는가? 걸리지 않는다. 그것이 신비이고, 우리가 살았던 시대는 더더욱 신비가 되는 것이다. 킹오브 신비. 신비 중의 신비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랬다. 나는 여수나 순천, 지각의 저변으로 저녁 바다가 밀어닥치는 것 같은 착시의 유년 시절에, 아마데우스처럼 상수리 높은 나무 아래를 뛰어 걸어나왔다. 무엇이 슬펐던 것일까? 그것의 단조는, 의식의 항목적 단조는, 그래서 단소인지, 무슨 전생이 있었기에 신비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일까? 소년에게 부족한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을까? 인생은 역전과 같고, 재미난 신비와 같다. 내게 부족한 것은 여자 뿐이니, 그래서 이처럼 신비로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서울과 광주가 의식의 고래로만 있을 때는 괜찮을 수 있다. 그런데, 광주 학생이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면, 서울 사람들은 빠가사리가 된다. 그리고 영어를 잘하고, 영문학을 잘하고, 유럽 연합을 탈퇴하면서, 영국을 담당하게 되면, 단풍이 피는 단 한 사람의 학생 대학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되면, 사람이 피리를 잘 부는 이유는, 그렇게 말을 잘하고 싶은 것이니까, 아무 말이나, 의식은 수준을 기본적으로 약속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미국과 영국은 빠가사리가 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광주로 내려오고, 미국이나 영국 유학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상복귀가 되지 않겠는가? 옛날처럼, 헐리웃 영화는 왠지 모르게 아카데믹하고, 한국 영화는 항목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드라마 속에서의 무시무시한 계시처럼, 이제는 다시 담을 수 없는 빠가사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