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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줄거리 느부갓네살 왕의 슬픈 이야기

by 마음대로다 2017. 2. 4.

줄거리 느부갓네살 왕의 슬픈 이야기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노동자가 없다. 실상은 모든 노동이 이야기와 같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통찰은 좋다. 일본말로 이데쓰네. 그렇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무례하며,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 많은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상 어디에 그런 무례한 이야기들만 잔뜩 챙기고 있다는 것인가? 줄거리라는 말은 정말 약간 지옥스럽고, 무섭기까지 하다.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문학 교육인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쓸데 없는 줄거리 지옥을 빠져나오는 방편인 것인가? 줄거리를 말하는 사람. 느부갓네살을 말하는 사람은 지옥남녀 같지만, 또한 세번째 실상은 그렇지 않다. 줄거리는 항목과 같아서, 앙드레 가뇽의 짧은 시간의 장편 소설, 그것의 압축파일 같은 그림 엽서 같은 것이다. 항목이 없는 절이 어디에 있으며, 항목이 없는 전세계 유일한 석조 건물인 다보탑과 스톤헨지가 어디에 있으며, 항목이 없는 강원도 산악의 진지가 어디에 있는가? 그곳에서 나는 도저히 줄거리로 담아지지 않는 사물의 현현을 보았다 하겠다. 초로에 묻힌, 재야의 한학자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나무를 어떻게, 베기도 하고, 그것으로 뭔가를 만들기도 했던 적이 없는데,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으나, 단지 옛날 한옥 문살이나 만들라치면, 그것이 그렇게 싫은 일이 아니면서두, 불만스러울 수 있으나, 일은 하루 왠종일 힘들었지만, 진지라고 하는, 매우 진지한 일을 그렇게 돌과 함께 해낸, 강원도 그 아름다운 숲, 하늘, 공기, 바람, 예쁜 여동생을 두고 있는 젊은 청년들, 그것의 순번이 어떻게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줄거리에 엮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또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방사수를 못한 젊은 여직원의 퇴근길, 그것의 묘한, 신학적인 템포를 내가 비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그리고 줄거리. 해가 뜨고, 지고, 퇴근하고, 수많은 혼사장애들, 혼외정사들, 이혼소송들. 그것들의 항목의 끝이 그만, 세상의 거대한 일장에서 분할되어간다는 사실이다. 더럽게 군대 생활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맨날 군대 축구 이야기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유류 탱크 사역을 나가, 선임병의 지시를 받아 빈탱크를 옮기고,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빵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치우지 않아도 되는 언덕의 흰 눈을 보다가, 새파란 하늘도 보다가, 그렇게 내무반으로 돌아가던 길의, 일병이면 그림이 없겠으나, 일병이래도 군대 체질이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상병 초봉쯤 되면 그런 짧은 마음의 촉이 생기는 것이다. 성장 이야기로 하면, 이영애는 한복을 입고는 이등병이 되었다가, 드디어 일병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뭐든지 잘한다고 하는, 옴니포텐스, 여신적인 속성을 입고 있긴 하나, 그것의 약정은 방송국과, 드라마 제작의 오랜 관습과, 한류라고 하는 결정적인 기폭제, 그리고 한강 세계 불꽃놀이 축제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약점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주어진 일에 대한 관계와 과정의 이라고 해야할 것인데, 이영애 일병이 만나게 된 그림 드라마는 논리적으로 약점이 강력하다 할 것이다. 사람은 그렇다. 그리고 군인은 그렇다. 더럽게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이라든지,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 항목 밖에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병 입대한 군인들은 사실, 상병에서 사라진다. 병장은 사회를 준비하고, 분명 다른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지만, 떨어지는 낙엽도 무서워하는 것이다. 상병은, 온 몸이 무기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등병과 일병의 일을 감독하고, 도울 수도 있는, 자기 머리에 잘 익은 군모를 갖게 된다. 그것의 템포, 그것의 새로운 침입, 그것의 작가적인 각성을 어디에 담을 수 있는 광주리가 없다. 사도 바울이 마태복음을 읽고 사흘 동안을 울고, 세상에서 죽느니, 풍요로운 가르침의 대지 위에서 죽고자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살렸다고 하는 고사는 특별히 유명한 것이 아니다. 일부러 감옥 같은 것을 만들어, 들어가 살았지만, 사람들이 문을 자꾸 고장내고 열고 무슨 일을 만들어 자꾸 불러내는 바람에 불가능하였다는 고백 또한 놀라운 것이 아니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믿고, 신봉하고 그렇다. 그것은 지금의 문명에서는, 틀린 것이 아니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그것의 참 뜻을 모르고, 이야기들을 믿고 떠받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와 증오와, 육체 이전의 잔잔한 죽음의 계단을 각성하게 되는 과정 안에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미 다른 줄거리를 상정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의 무시무시한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과 같다. 줄거리는 섹스와 같다. 그래서 존재가 이야기이고, 본질이 줄거리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아무 인과가 없는 살인 사건 같은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줄거리가 살인의 도구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 무례한 이야기의 수집가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아무리 봐도 줄거리는 섹스와 같다할 것이다. 사람들은 리셋하고 싶어하고, 자기 삶을, 그런 뇌의식의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 섹스를, 정말 뭔가 해부학적으로 잘 알아서인 것처럼 하게 된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이, 원인은 전혀 다르나, 같은 것일 정도로.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 친구가 성욕이 너무 강하다고, 그래서 헤어져야 하느냐고 우리 인터넷 촌구석 상담실에 문의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잘 몰라서, 웃고, 저마다 돼지 방광 축구를 즐겼지만, 대답 없는 몇몇의 소수의 현인은 남자를 위로하였다. 나와 같은 사람마저도, 그에게 사람에 대한 등급을 놓거나, 헤어지기를 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너무 그렇게 세큘라, 줄거리만 따지면, 남자는 여성화되고, 여자는 나팔관이나 선물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