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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럭키(2016)에서 보이는 한국어적인 홍록기......

by 마음대로다 2016. 12. 6.

럭키(2016)에서 보이는 한국어적인 홍록기......







어떻게 하다 보게 되었는데, 나는 전혜빈이 많이 나온줄 알았는데, 별로 나오지 않고 그랬다. 문익점이 고려로 영화를 가져오면서, 그래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이익이 되라고, 모든 해석은 자기 목화씨라고 했었다. 그렇다. 우리는 고려는, 영화를 생각하지 않으면, 고려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옷을 잘 입는 것도 자기만의 목화씨라고 말이다. 우리가 좋은 옷을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저마다의 목화씨, 제일모직이 좋고, 곳됴코, 이름 하나니 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주 기초적인, 막천으로, 아무런 핏도 없이 지어진 옷도,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백일 동안을 입고 다니면, 좋아지게 되어 있다. 하물며, 핏도 좋고, 옷감도 좋고, 패턴도 마음에 들면, 시내에 아무런 생각으로 자주 나가는 중에 자주 입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발라드 같다. 한국어 최근 중심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묘하게, 버뮤다 삼각지, 아직까지 외국 팝송이 아주 어린 학생의 정신까지를 개화시키는 영역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기계장치가, 우연히 음향이라는 수리적, 양적 배치를 통해서, 사람들이 흥겨워지는 고시원(우리 한국 지금 고시원이 아니라, 상고 혹은 시원 시대)을 상상한다는 것이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 보통 부모가 어느 아무런 통독의 능력이 없는, 그것도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니라, 좋아하는 두꺼운 고전을 방학 중에 일독을 결심하고, 그대로 실현하는, 그런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자기 남자 친구라고 소개할 때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여기겠는가? 그래서 무례하게, 그 젊은 소년소녀를 막대하지 않고, 자초지종을 듣고 있노라면, 그런 고시원이 분명 있는 것이다. 조금 우스운 소리를 해도, 좋아하고, 부모가 있어도, 주관이 되어 좋아하고, 떠들고, 심지어는 자기 남자 친구가 유머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어떻게든지, 영문학이라는 억지를 통해서, 훌륭한 말의 바로미터를 사람들의 의식의 처음에 각인시키는 것이, 어쩌면 보이지 않는 모더니즘 지휘소에서의 심각한 목적이 분명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껍질을 만지고, 계속 만지면서, 간혹, 예수님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 껍질로 내비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는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엑스맨에서의 초능력처럼, 그 불꽃같은 눈빛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보고 사는 것이다. 서로 다르지 않고, 아들이나 딸이, 그나마 아버지를 따를 수 있을 것 같아도, 거기서 심각한, 우리가 잘 모르는, 함수가 작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클래식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내가 집을 나서는 발판으로 새로 장식한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가 연주할 수 없다는 심각한 오류. 대충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민주주의를 추종하고, 경제정의를 존중하고, 헤피엔딩이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세계관을 나눌 수 있는 언변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아도, 지리산 실상사,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겨우 직업에 관련된 것만, 길게 늘어선 꼬치구이처럼 좋아할 뿐. 저지먼데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특히 자기의 성징을 감추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다. 처음에는, 강철은 공장과 버스의, 내 눈에 비친 내 직장 껍질이지만, 저지먼데이에 가까워 오면, 성징을 이야기하다가, 다시금 그 버스에 타지 못하고, 철제로 온 몸을 뒤덮은 몬스터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작은 차이도 차이라고, 사람들은 자기들 약한 성징을, 죽을 때까지의 사춘기를, 좋은 문법이나, 그림으로, 이야기로 표현해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그다지 우리 사는 곳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럭키는 어쩌면, 미국 영화 일반을 가리키고 있다. 유부 우동을 먹고, 튀김 우동을 먹고. 함께 영화를 보는. 그런 낭만이란 것은, 과학의 실제이고, 처음이자, 어떤 지구의 세포가, 칼의 무기질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발생하여, 보게 되는 세상의 처음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게 자기가 살고 있는 것 같고, 자기들이 살고 있다고 티비가 끊임 없이 말하는 것 같다. 영화가 처음이고, 사람들이 그 맨처음을 향유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오래 되었고, 세상 어딘가에, 젊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날 만한 근사한 국가가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좋은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고, 별로 높임말을 할 줄 모르는 여자를 만나거나 지나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런 뿌띠. 그런 브르조아. 그런 영문학적 사명. 그러하다. 참으로 영문학적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슨 말이냐면, 저지, 그것은 종말이 가깝다는 것이고, 먼데이, 그것은 멀다는 것이다. 누군가 회의가 깊어서, 그 모든 고대의 것을 딱딱하게 만진다 해도, 영문 소설을 영어로 한국어처럼 읽을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회의의 자격이 조금은 멀리 있는 것이다. 회의는 할 수 있고, 누군가 할 만한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죽기까지 영어를 아주 잘 해서, 이제는 별로 장애가 없다 싶을 때, 그때부터 할 만한 것일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소망이 크고, 때로는 말주변이 없는 소년도, 소녀도, 장년들도 만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문학으로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가 연습하는 대게의 영어 문장들이 실제로 그와 같은 소망의 시간 여행들로써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존만한 트럼프 노무현 같은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