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과 '도깨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신년 인사
우리는 외롭고, 우리 안의 괴로움은 우리를 보장자산으로 만든다. 우리는 어렸을 때, 내 이름 신현균과 같았으나, 나이가 들면 반드시 보장자산이 된다. 그것이 움직일 시에는, 더더욱 데모닉 망가가 된다. 참 그것의 숱한 지리상의 발견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어렸을 때 분명히 신현균과 같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보장자산일 수가 있다. 그것이 어렸을 때의 얼굴을 하면, 묘한 빛깔일 수가 있다. 장미빛. 우윳빛. 초록빛. 이런저런 각종 국기의 빛깔들일 수 있다. 유니온 잭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의 예수님 옆구리의 로마 병사의 창을 엿볼 수 있다. 어린아이일 때부터 보장자산이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의 대륙이요, 성경에 기록된 바, 여호수아가 단 한번 패했던 아이성이니 만큼, 그것이 찬란한 빛깔이었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어려서도 신현균이요, 청년 때에도 신현균이요, 더더욱 빨라서 신휘요, 장년이 되어서도 신현균인, 추상적인 기호로만 보면 단조로운 것보다, 어렸을 때는 신현균이요, 약간의 보장자산이요, 청년 때에 그와 같은 과감한 빛깔을 내비치고, 한국 깡패 영화를 새로이 좋아하고, 마침내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랑하는 식인종의 거대 냄비 안에 흙을 담고, 향불을 가득 피워올리는, 어쩌면 식인종의 자기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나마, 보장자산이 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도리어 스펙타클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을 남자들도 좋아하고, 여자들은 더더욱 그와 같은 남자를 선호하고, 프랑스의 고대명칭이 장랑스라고 했던 것처럼, 국가 전체가 그와 같은 인맥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미술가들은 원래 양명학적으로 멍청하니까 그것들을 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언하자 보니까, 단 한차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우윳빛깔의 모습을 연모할 수 있는 것 같다.
둘다 장랑스에 넘나드는 것이 있다. 화랑도 그렇고, 도깨비도 그렇고.
그런데도, 그와 같은 시한부 인생이 그렇게 눈에 가시밭길, 우유빛깔처럼 들어오고 그렇다.
전쟁이 거대한 장랑스였다면, 우리는 빛을 밝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익숙한 컨벤션을 신현균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장랑스가 서서히 우리를 덮쳐오는 것이다. 그것의 피크가 장랑스의 대변인이었던 한국 정치인 권력자들을 향한 청년들의 미성숙 철학의 행동주의였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있고 없다. 우리는 그런 합죽선이 있었는지 모르고, 때로는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울고 불고, 눈물 흘리고, 그와 같은 센티멘털리즘이, 두고두고 우리에게 소금의 알콜램프 가열 실험처럼, 그 작은 도자기 종지는 하늘의 보장자산, 중국의 어떤 황제가 들어올리려다가 실패하여 크게 다쳤다던 고사를 적잖이 위로하는 듯한, 그런 노래노래, 한소절 한소절이, 민중들의 천문학적 개성주의를 촉박하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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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랑스는 장랑스와 싸운다. 그것이 대체 무엇으로 합성하여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아무런 중국 사극이라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보장자산들이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우리들 사극일지라도, 화랑도가 넘친다. 명랑이라는 하찮은 한국영화마저도, 칠석의 고싸움처럼, 조선배와 일본배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화랑을 꽃피우고 있다. 그것이 장랑스가 되려는 부단한 시간과 템포, 신경세포 뉴우런의 뉴트니제이션, 중력의 비극이 되려는 것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잘 안 보이고, 한국인의 한국어라서 잘 안 보이고, 이순신을 삼각형 저 깊은 도형적 심볼리즘으로 깨달은 자연적 유기체적 한국적 지식인들에게는 엔터테인먼트적인 불쾌감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부싯돌처럼 해서 보이는 것이다. 이상하게 늘 슬프고, 바늘에 찔리는 것 같고, 옷을 많이 입은 것 같으나, 늘 없는 것 같은 동양의 고전 복장들을 잘 덮어주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의 소용, 그것의 소매, 그것의 디스턴스. 그것의 단막극적 숙명.
도깨비는 더한 데가 있다. 정말 도깨비 같고,
그것의 부분 사극은 우리에게 화랑과 구분점을 찾지 못하게 하고, 신현 제주귤로지의 정점으로서의 국문학적 슬픔의 야바위 회전판을 바늘 찍게 한다. 누군가는 진심이 있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홀로 떨어지지 않아서, 그래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여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회전판이 악명이 높아서, 대게는 웃음으로 진행하고, 그것은 또한 정확한 웃음도 아니다. 과연 그와 같은 공식이 있을까? 군대는 남자들의 고난이고, 남모르는 지역에의 깊은 여행, 그리고 근무지역의 시골 터미널이라고 한다면, 여자들은 그것이 완만하고, 상시적이라는 것. 군대에서 군인들은 치마만 봐도 환호를 한다고 하는데, 반면에 여자들은 얼마나 남자들이 많은가? 뭔가 도깨비처럼 안 맞는 것 같지 않은가?
진심과 눈물과 사랑이라는 삼합에 사람들이 논개와 일본장수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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