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티비 지상 천국 같은 사임당 빛의 일기......
작가도 그렇다. 아무리 봉건제나, 독재 특유의 정권 아래서, 권력에 아부하는 것도 예술의 임무라고 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정확하게 어느 부분에서 그것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지는 모르나, 그냥 싫고, 김윤식의 국문학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고, 백낙청의 영국 낭만주의 시나 소설에 대한 청강도 하지 않을 채로, 단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체반정적으로다가, 지나치게 예쁘게, 나진 선봉, 지나치게 아무렇게나, 툭하면 애들끼리 싸움을 시키고, 별로 시답지 않는 초자아를 감추지 않고 화면에 내비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문학적인 구슬픔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달동네에서, 구슬을 그렇게 이것저것 자기 먹을 것도 못먹고 입을 것도 못입고 콜렉션을 해서, 그것이 땡땡해지고, 딴딴해지고, 자기가 오래도록 보아서 질린 나머지 가치가 떨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것을 푸는 것이다. 그런 것을 구슬픔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슬의 아들 딸들이다. 딱 구슬같이만 살고, 떡구슬 같은 아들딸들을 낳아, 그들이 못나던 때를 지나쳐, 잘나게 되면 분가시키고,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로 보인다고 하는 옵티칼 일루젼 혹은 옵티컬 미쏠로지들을 사람들에게 전파시키는 것이다. 그 전파를, 우리는 방송국도 없는 채로, 받고, 수렴하고, 긍정하고, 긍정에 표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우물가에서 그와 같은 한 항목적인 레토릭을 과시하고, 딸들 키워봤자 아무 짝에도 소용 없다고, 집에 있는 제일 좋은 항목을 빼가는 일 밖에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그렇게들 수긍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다 못해서, 그런 수가성의 여인에게 물을 청했는지 모른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예수님이 그 여인을 두고, 어째서 결혼 한번 한 여인이, 세번 네번 한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냐 꾸짖으니, 여인이 크게 놀라고, 인간에게는 구슬 같은 옵티컬 일루젼 혹은 옵티컬 미쏠로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와 같은 동천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녀가신 뒤에, 세상 남편 같고, 연인 같고, 교회 오빠 같은 그가 떠난 자리가 애통하기 그지 없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물동이를 짊어지고 집에 오면서, 그 수가성의 여인은 뭐라고 했겠는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그와 같은 한국어는, 한국어의 편린은 어떻게 다 담을 수가 없다. 정리할 수가 없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처음부터 그랬고, 도저히 한국 특유의 전통 사극으로 보기에는, 부분부분 내비치는 경박한 부분이 그와 같은 채널로 우리를 이끌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것도 잘하면 되지 않나 싶다. 찌찌뽕. 우리는 서로 다른 디멘젼을 살아도, 같은 말을, 같은 맥락과 목적으로 하는 때가 많은 것이다. 아니 중종이, 사임당을 보고는, 중전으로 삼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오윤아도 예쁜 편이다. 남자는 원래, 미신적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며, 학문적이기도 하고, 즉흥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부자면 뭐든지 하고 살 것으로 여기는 편견이나 프라이드 자동차 비슷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로서의 양적 영역을 분명 갖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어째서 오토바이를 가져서는 안되는가? 하늘 아래, 형상의 원칙이 있어서, 메시지와 함께 아름다운 색상을 펼쳐 보이면, 십의 일조를 줄 지언정,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질 확률은 높아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자면, 세계 각국의 자동차 오토바이 디자이너들은 디자인만 해놓고, 막상 자기는 타지는 못하는 세상을 살 것으로 연상이, 어쩔 수 없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모순은 성경과 같다. 성경이 피라미드처럼, 그러니까 이집트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자, 중심추, 세상 모든 석조 건물과 권력의 참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세부는, 새의 부요는, 참으로 중요치 않다. 그것의 파라오의 석관은 자세히 보면, 성경이 놓여진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뜨거운 햇빛 아래, 책을 읽을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성경을 중심으로 꿈쩍도 안하고, 오시리스, 밤하늘의 별이 회전한다. 나와 같은 불만으로 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비슷한 운명의 사람들과 함께 산채로 순자 된 것이다. 그것의 붉은 태양. 그래도 내가 뚫으면 그들에게도 뭔가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으로 산다. 아무리 둔한 눈을 갖고도, 그런 것이 눈에 띤다 하겠다. 대신에 비슷한 운명이 나처럼 가난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에 클래식의 비밀이 있다. 나름 부자인데, 비본질적인 것이다. 오윤아를 일라이자, 혹은 이스라엘로 보기로 하자. 좀더 본격적인 미인을 선택해도 되었겠지만, 이영애가 대장금에 비해 완벽하지 못한 인격을 갖고 있어서, 가끔 초자아만 내비치는, 사람들과 함께 노동하는 노동당까지, 그것의 우리들의 병아리 감별사 같은 무의식이, 오윤아 정도?의 대항마를 갖게하였을 것이다. 너무 예쁘면, 이영애에게서 권력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세계관 조작가들끼리의 두려움? 그렇다고 보면, 등장인물들은 그나마 지평선 위에서 높이가 있는 보기 좋음을 선사하는 것이기 보다는, 누군가 오래도록 보관하고, 오래도록 보아와서 질린 나머지, 자기는 그것 때문에 먹을 것도 먹지 못했으면서, 물론 그럴 확률은 없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정성은 하나님은 분명 아시고 계시니까, 그것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푸는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역이 객관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우리가 위태롭게 보는 것이지, 그 구슬이 어떻게 단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드라마가 무의식이라는 원칙에서처럼, 불초자열혈남아 의식도, 그나마 작은 지식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영애를 응원한다. 그와 같은 용수를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조혜련마저도, 이영애를 응원한다. 구슬의 특징이 무엇인가? 키가 작고, 딴딴하고,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특징이 무엇인가? 키가 작아도 비율이 좋고, 그런 여자와 자주 걷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구슬을 조금 배치하면, 우리가 원하는 높은 방정식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그대로 드라마를 보면, 결혼한 여자마저도, 내가 아직 확률의 일도 없는 박지윤과 만날 기운을 내비친다 하면, 영혼이 자기 헌 부대를 찢고 그 옛날 역전앞으로 나온다는 이상한 사실이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은 구슬과 같다. 수나라 수필 같은 예수님의 세계에는, 여간해서는 악역이 있지 않고, 다만 선에 대한 의지와 결정적인 미담의 왕국이 있지만, 그리고 의식의 목전에 뚜렷한 권력적 현실이 있지만, 구슬들은 늘 자기들이 공부를 못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구슬을 푸는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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