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시간을 선별한다.
누군가 한 말이다. 내가 한 말이다. 어째서 이런 말들은 남이 한 것 같고, 남이섬, 내가 한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하다. 이 말에는 용기가 실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은 말 뜻이 용기이다. 단과 당은 발음이 유사하고, 한자어의 의미적 진행도 비슷하지만, 그것이 좀더 안정적이고, 국내적인 것을 요구할 때는 단이라고 했고, 활달하고, 자유로우며, 이성적인 관계에서 달달한 것을 요구할 때는, 국제 결혼적으로도 여행이 자유로운 것을 뜻하고자 할 때는 당이라고 했다. 그것이 지금에도 같은 용례를 가진다. 우리는 단 것을 단 것이라고 하고, 설탕을 한자어로 설탕 당이라고 한다. 그에 관해서는 영어마저도 거들고 있다. 독일식으로 읽으면 당거가 되지만, 지들끼리는 대인저라고, 매우 물 떨어지는 것 알 수 없는 측우기를 돌리고 있고 그러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용기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백이면 백, 우리가 백설탕을 가슴에 품으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용기가 없어서이다. 사람들은 무인도와 같고, 남자가, 혹은 여자가, 들어서면 꼼짝 없이 미학은 그를 중심으로 정립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용기가 없고, 그것은 섬, 용기가 강요된 배의 홍난파의 사람을 연모하다가, 그 또한 측우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여기서부터는 잘 모르겠다고 하겠지만, 시카고 타자기를 보면 매우 상업적인 것도 있고, 옛날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묘하게 국어학적으로, 그러니까 어원적으로도 뭔가를 고발하고자 하는 느낌도 든다 하겠다. 대필 작가라는 것은 생각보다 도덕 본체의 문제 의식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철학적 지향으로, 예술 지상주의적 열정 같은 것이 엿보이는, 자기 학대와, 때에 따라서는 화염방사기를 쓰겠다는 것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시 대림이고, 스쿠터의 깊은 그림자, 누군지 잘 보이지 않는 개활지에서의 이동, 모든 작가가 가필이고, 대필이며, 청탁이고, 백제의 난봉황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처음, 국문학 컨테이너 박스에 끌려오기 전까지의 풍경이라고 하겠다. 아이 때는 천사와 같아서,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이것은 거의 오래된 생명론이기도 하고, 단순한 형이상학이기도 하며, 매우 시각적인 신학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설현이 시카고 타자기를 썼다고 하면, 오십 정도는 먹어갈 수가 있다. 자아정체성은 부족하지만, 뭔지 모르게, 이지아와 친할 것 같고, 이지아는 어떤 비연예계 지식인과 친할 것 같고, 그런 자유로에서 꺾어 들어간 곳의 별장 같은 것을 상정하게끔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무식할 수도 없고, 이 많은 사람들이 경제 동물일 수도 없으며, 이 많은 사람들이 내용이 없는 작품으로서의, 그런 말뜻으로서의 불온한 지식인일 수도 없지 않은가? 설현은 대단하지 않다. 꼭 시카고 타자기 같다. 인형은 대단하지 않다. 그것을 갖고 실패를 했으면 했지, 한꺼번에 여러 개를 꺼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많고, 문예론적으로 자수성가를 해서, 그것들로 자기 방을 가득 채우고는, 과거 시대보다는 작품의 질과 양, 뭐 그런 것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자기들 시대의 것이 이처럼, 단위 시간 대에 걸쳐,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주장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은 것이다. 대두에서 대두가 나오고, 소두에서 소두가 나온다. 그 모든 것이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솔직히 대두가 좋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문열은 대두였다. 사람들은 그의 스토리라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무슨 스토리라인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겠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한다. 간첩이라고 당장에 잡아들일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이다. 때로는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계속 출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혁명도 계속되고 한다는데, 간첩도 고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은, 형이상학적 해방감을 심어주지는 못했지만, 약간 논쟁적 자리에서, 사람들로부터 내면적인 환심을 사지 못하는 주장을 점점 더 자주하게 되었지만, 그가 사람들로부터, 나에게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것은, 그가 대두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마을에 대두조차 없는, 동남아의 국문학적 풍경을. 사람들은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소정의 읽을거리와, 마땅한 대두의 문장을 찾게 되어 있다. 어째서이겠는가? 그것은 총알과 같기 때문이다. 총명한 사람이 먼저 쏜다와 같은 황야, 혹은 남은 탄환까지 모조리 계산한다와 같은 러시안 룰렛. 우리는 총명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마을 이름이 약간 우스운 우리들 평범한 농촌에까지 이미 파급되어 있는, 건전한 정신병이다. 충남 보은에서도, 남한강 양평에서도, 총명함에 대한 건전한 정신병은 오래된 것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가고, 여행을 오는 것은, 생각보다 보이는 것만을 추종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반드시 천사가, 뜻도 모르고 내면을 채워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는 양적인, 그러니까 카이로스가 아니라 크로노스일 때가 많아서, 잘만킹, 잘잘못을 잘 가린 다음에, 백제처럼 출동하고, 황산벌에서 절대적 대상과, 영원적 객체와 마딱뜨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가 없는 듯 하지만, 이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유출과 같고, 여자는 그런 유출을 함께 경험하고 싶은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여자는 대자연에서 섹스하고 싶은 원대한 소망 같은 것이 있다. 어째서 그와 같은 내면철학이 발달하였는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럴러면 좋은 보트가 있던지, 좋은 별장이 있던지, 잘 알지 못하는 괜찮은 패키지 여행 프로그램이 있던지, 아무튼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돈이 많이 필요하는데, 그와 같은 의지가 사람들에게 낭만의 사업을 만드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막상, 고리키, 그러니까 그렇지 못하고, 원래 뜻이 무엇이었는지 까먹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남자는 용기가 없다. 다만 강요되고, 그것도 나름 집단 무의식이 된다. 남자들 사이에 여자가 있어도, 덩달아서 스포츠맨쉽이 생길 수가 있다. 유학은 묘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서양 철학과 사상, 공부의 패턴이 수입이 되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그것의 혜택이 돌아갔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풍우란을 제외한 학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우리는 도올에게 기대하고, 도올에게 실망한다. 그것은 지하철과 같다. 절대적으로 한양대의 언덕을 오를 수 없다. 그와 같은 기대를 하루하루 갖지만, 절대로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여자도 그렇다. 여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용기가 없어도 되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 모습과 같다. TV를 보면서 우리가 같은 존재의 좀비도 보고, 동물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여자와 같은 생각의 프로그램이 있어서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정확한 수학 프로그램이 아니면, 우주에서 우리가 산소 부족로 죽는 것처럼, 기압이 다른 곳에서 우리가 폭발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티비에서 보는 여자들은 우리가 아는 여자들이 아닐 수 있다고 말이다. 남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의 여자라고 하기에는, 무슨 털 하나의 색깔만이라도 학계에, 학개, 보고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는 우연을 가장한 눈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뒷통수에도 있고, 삼차원적 사고를 이차원적 연극으로 극복하려는 모습도 있고, 보통의 인간들처럼 눈이 두 개인 것처럼 애써 노력하는, 경찰들까지, 발견하게 된다. 보통 눈이 하나이거나, 세 개 이상이 되면, 싸움이 나고, 불이 나고, 다섯 개 정도 되면, 멀쩡한 마을에 저 아프리카에나 있는 식인종이 나타나고 그렇다. 두 개가 좋고, 이미 우리가 잘 살아왔기 때문에, 보기도 좋고 그렇다. 욕심이 과하거나, 필요를 따지거나, 전자파를 늘여보거나, 영화 속에서도 묘사된 적이 있는, 알고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거대 욕심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학적 형이상학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나, 겨우 다음으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시카고 타자기를 보면, 불쌍하고, 중국 남방 불교의 모습 같고, 냄새를 풍기다가, 눈이 나오는 것 같고, 뭔지 모르게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같아도, 아무 것도 선별하지 못하는 여자들의 대리 작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선별을, 여자들도 작은 용기를 갖고, 행주산성, 권율을 잘 펼쳐서,
했다는 말인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용기는 시간을 선별한다. 우리는 사건사고를 기다리고, 내가 또 어떻게 바닥에 떨어진 파편과 돌들을 쌓아올려, 안노히데야키의 고질라가 레이저를 발사하는지 지켜보는 시간을 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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