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어디가 원조인가? 원조논쟁의 신학적 성격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7. 4. 30.

어디가 원조인가? 원조논쟁의 신학적 성격에 관하여





만나지 못하는 우리 가뇽상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와 가뇽상은 찰떡궁합과 같다 하겠다. 춘원 이광수만 해도 그렇다. 그의 형식의 집. 영어 과외하던 여학생 두 명. 그리고 영채의 방문. 아무래도 형식이 프로타고니스트인 만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악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형식 혼자 선구자처럼, 일송정 푸른 솔처럼, 만주에서, 백두산 정계비, 혹은 광개토대왕비, 그렇게 홀로, 쓸쓸하게, 피사체만 파사드하게, 그렇게 포네틱한 전개로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을 존재론이라고 한다. 존재론을 익히면, 케로로가 된다. 그것도 철학이라고, 우리가 앵포르멜일 때보다는 케로로가 나은 것이다. 모든 민중 드라마류는 그렇게, 사를마뉴, 케로로의 슬픈 전진과 같다 할 것이다. 보통 그것을 양서류라고 한다. 약간 핀트가 맞지 않는다. 양서를 많이 읽으면, 사람 중에 사람, 옴니포텐스가 되는데, 무슨 개구리인가?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도 하기 전에 납득이 된다는 것이 있고, 다음에는 그것이 영영이 맞지 않는다는 확고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서를 많이 읽어서 양서류가 아니라, 다만 양서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갑자기 맞이하게 된 영채는 약간 양서류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붉은 색을 가졌고, 그녀가 형식에게 들려준 아우토바이오그라피는 어감과 결과의 면에서 매우 형이상학적이었다. 별로 첫만남에 그런 험한 이야기는, 혐한처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데, 그만 많이 하고만 것이다. 그렇게 무정은 우리나라 근대 소설의 클래식으로써, 전진하고, 전진하여서, 무등산도 발견하고, 아름다운 전라도 지역도 발견하고 그렇다. 무등산에 오르면, 집들이 그만, 맨션처럼 아름다워서, 살가워서, 꼭 물난리에 드러난 화순적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염원이 참 멋지고, 그림지고, 뜻과 필치가 은은하고 동시에 확고부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영채와 다른 여성이 사람들에게 근로를 장려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민족적 미래를 밝히는, 바로 그런 노래하는 모습이 바로 무등산의 서석대와 입석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게 되고, 저 낮은 곳에서도 같은 그림을 찾을 수 있고, 마음 맞은 처녀를 만날 수 있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중심으로? 노동 개조 민족 특위 발전 독서 소모임 등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선사하는 듯 하였다. 소설은 아름답고, 소설은 그만큼 힘이 세다. 


그러나 핀드 발, 이와 같은 의식은 자체에서부터, 그러니까 다른 관계에서부터 아니라, 자체에서부터 파괴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약은 고어구, 입에 쓰지만, 양약은 고어구,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버지는 노비의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노비였다 하는 누군가의 시에서의 고백처럼, 우리나라에 노비가 아닌 아버지를 두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사처럼, 작가처럼, 다만 화사하게 꾸미는, 드라마에서의 화사담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기독교의 세례처럼, 씻겨지지 않는, 나아만 낫지 않는 것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서정주는 그때가 조금 화사했다. 그리고는 노비가 되었다. 원조논쟁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원조논쟁을 하는 것은, 기쁨을 상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정주의 아버지가 노비였다는 것을 알고 기쁨을 느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암살,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살 때문이었고, 죽기 전에 엄살피우는 김상병 때문이었다. 우리는 복합적이고, 인지는 사실 그 깊이가 생각보다 깊다. 그러나 국문학적 원조논쟁, 누가 원조 소설가이고, 누가 원조 비평가인가 하는 것에는 함묵하게 된다. 침묵은 침목 같은. 누군가 썼을 것 같은 소설적 소재. 허영만이 아귀찜을 가지고 말을 했을 때가 좋은 것이다. 원조논쟁은 사실 무시무시한 것이다. 딱 적당하고, 예쁘고, 듣기 좋고, 적당히 경쟁적이고, 만화적으로 아름다울 때 그치는 것이 좋다. 사상의 원조논쟁, 예술의 원조논쟁은 하기가 어렵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가하려면, 먹거리의 원조논쟁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버무리려고 하는 형태는, 과연 우리가 처음일 것인가? 아니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일까? 양약고어구, 가장 고통스러운 원조논쟁이 바로 좀비이다. 좀비는 어디서 나왔는지가 알 수가 없다. 로봇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말을, 우리가 알지만, 좀비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서울 사는 친구가 대충 알고 있는 것에 놀랐고, 나도 조금 알고 있는 것을 덧붙이기는 했으나,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물론 출판된 것들 세상보다는, aubade 한없이 나은 것이었을 것이다. 


원조는 그림자이다. 원조는 일종의 원조교제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교제에서 태어나고, 그와 같은 교제에서 먹고 마시며, 그와 같은 교제에서 교육받고 그렇다. 원조의 깊은 그림자를 우리는 형식이라고 하지만, 그것의 영채를 어떻게 다 담을 수가 없다. 형식은 다 빼고, 오직 내용의 영채만이 그 처음의 모습에 어른거린다. 영어를 공부할 수 있겠는가? 영채가 숱한 사연들을 끌고, 공부자의 시간적 가난을 잡탕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날로써 불가능해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를 공부해서 무엇하는가? 그것이 또한 영채이다. 서영채라는 비평가가 있다. 영어는 아주 조금 하는 것 같고, 문장은 음악이 통과하고, 에어리즘, 한국어 기본으로서의 들숨과 날숨이 훈련되지 않는 사람 같다. 맥락도 없이, 이름만 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다만 수많은 서영채 작가나 수많은 서영채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눈에 띠는 정도는 된다 하겠다. 


우리는 영채 어디쯤엔가 좀비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필순은, 작가가 다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소설 어딘가에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암시를 받는다. 필순은 그렇지 않다. 필순은. 장필순도, 부모가 이름만 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에게서, 문자적인 의지가 엿보이지는 않았다. 노래하면 끝이 난다. 그것이 노랗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선비가 노래하고, 기생들과 노는 것이 좋지, 노래가 계속 되고, 기생이 자기 일하고 있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우리 옛날에 선비족도 있었고, 말갈족도 있었다. 선비족은 선비였을 것이고, 말갈족은 한국말을 쓰긴 하지만, 아주 걸하거나 갈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좀비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육이오사변도 겪고, 좀비 영화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체질로 바뀌었다. 그것은 우리 사는 세계가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버지가 좀비에 능숙하고, 조금이라도 뭔가를 가르칠 것이 있다고 하면, 하늘에서 좀비가 떨어지는 것은, 새끼 부엉이가 배우지 않고도 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