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인문학인가? 아니면 과학인가?
어린아이들은 과학을 봉선한다. 그래서 맨발의 기봉이, 봉주르 이봉주, 그리고 신봉선 등의 스포츠 카와 같은 질주에, 아이들은 조금은 관심의 방향을 꺾는 것이다. 내일 화엄사를 가려다가, 마음이 꺾어지는 이유는, 내 마음의 화엄사가 너무나 아름답고, 불국사보다 아름답고, 화엄사는 더 이상 그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바나나 냄새 같다. 바나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무슨 행사에, 바나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물 증여로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서서, 받아갈 것이다. 고작 이천원 오천원 하는 묶음일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바나나는 우리에게 바나바를 다오 외쳤던 성경 속 군중들처럼,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싫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화엄사는 넓고, 사람들이 가난한 동양 사상과 전통을 위해서, 날뛰고, 무술 영화 잔치를 벌이고 싶어도, 그와 동시에 그와 같은 마음이 가라앉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넓고, 넓어서 공부를 안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쌍계사만 해도, 예쁘지만, 왠지 가문이, 집안이, 쌍스러워서, 눈에 불을 켜고, 계단을 오르고, 금세 공부를 하고 할 것 같은 긴박성을 선사한다. 그러나 화엄사는, 집에 꽃나무가 하늘처럼 높고, 사람들이 전국방방곡곡에서 청혼하러 모여들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칼 맑스는 그것을 돈의 힘이라고 했다. 그렇게 넓고, 쌀이 많고, 꽃나무가 그렇게 크고 하면, 사람들은 그곳이 천국인 줄 아는 것이다. 때문에 화엄사를 두고, 공부의 본향, 깊이의 경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백마강, 낙산사, 그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는 신현균의 화엄사가 마치, 토탈 에클립스처럼 겹치는 때는 좋으나, 그가 방문하지 않고, 한번 방문으로 배가 부른다 싶으면, 화엄사는 다만 크고, 왠지 거기에서는 이제는 스포츠를 했으면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전업을 할 것 같은 분위기, 점포를 정리할 것 같은 어수선함 같은 것. 내가 방문한다 하면, 다시금 절옷을 입고, 그것이 소문이라고 하면 다시금 템플 스테이라도 할 것 같은 추억. 살인의 추억. 스포츠는 과연 거기서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은 어째서 인문학도 하고, 동시에 과학도 하는 시간을 살지 못하는 것인가 자문해본다. 그것은 화엄사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모지리산이 화엄사만 크면 무엇하겠는가? 화엄사는 왠지 모르게, 공부는 지지리도 안하고, 천주교에 빌붙고, 엄정화의 포이즌 노래 따라하고, 꽃가게나마 조심스레 잘 운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민중적인 이상한 느낌, 주자를 따라다니는 무량수전 같은 느낌이나 주는 것 같다. 화엄사는 스포츠 선수들과 친하고, 돈많은 모지리들, 백양사처럼, 썬팅을 하고 괴물들을 숨기는 비싼 차량들과만 친한 것 같은, 계속, 평생, 혹은 영원한 그런 느낌인 것이다. 화엄사에게 어째서 빛나던 꽃의 시기가 없었겠는가? 내 생각에는 쌍사자 석등이 있는, 딱 그 정도의 절이었을 때는, 정말이지 지리산의 화엄사라고 불리웠을 것이다. 규모 있게 잘 지었더라면 모르겠으나, 대흥사나, 불국사를 다녀오고 나면, 화엄사는 정말이지 왜 이리, 모자라면서 돈이나 많은 느낌을 주는지, 그런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이 알다가도 모르는 일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산이 있으니, 절이 크고, 산을 닮아서, 절의 배치도 가져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안스테인드 글라스처럼, 그러니까 그을린 것이나, 칠한 것이 없는 유리 조각들처럼, 우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화엄사니까, 엄마를 찾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보면 금세 아빠가 떠오르기도 하고,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은, 매우 부자인 한 때를, 사업이 실패하기 전의 한창 때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공부하는 것이 없고, 크다고만 생각하면, 또한 작게도 보이고, 고건축과 제법 현대 건축이 아무런 서로 어울리는 것도 없는 것이다. 정말 그런 느낌인 것이다. 크다고 하면, 대게인 것인데, 대게에도 다리에서 비닐 같은 것이 먹다가 나온다고 하면, 그런 알 수 없는 오브제의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돌과 같다. 높이에 도전하면,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다. 절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죽기 전의 모습과 같고, 죽음이 상시적인, 그런 임사체험의 연속과도 같다. 좋아하는 절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죽음의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흥사의 모퉁이, 송광사의 향나무, 선암사의 뒷쪽 언덕 집, 불국사의 계단과 다보탑은 모두 그것의 흔적이자, 사람은 여러 번 죽는다와 같은 증거들인 것이다. 화엄사는 아무 것도 없다. 화엄사는 미치도록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정말 죽음 같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그 말의 뜻을 높이 샀던 적이 있어서, 그것의 얼음 물병 표면처럼 결로 현상이 더더욱 드러나는 것 같은 것이다. 조그만 기다리세요. 분명히 전화 통화가 되었는데, 온 몸이 차갑게 식은 뒤에 구조헬기가 도착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 같고, 그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죽음이란 옹졸한 꽃잔치인 것 같다. 화엄사에 대한 불만은, 보이는 모든 산세를 가져오고, 구례까지 화엄사라고 억지를 부리고, 불교적 신정 정치의 시범 지역이라고 선포하고, 그러니까 악명 높은 이웃 절의 입장권과 같은, 심지어는 섬진강 물을 따로 담아 판다 해도,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 같고, 참 임사체험만 같다. 쥐라기 때와는 달라서, 요새 고등 생명체들은 자동차 구멍에서 나와서, 그냥 다른 구멍으로나 질주한다 하는데, 그것과 정말 많이 선명하다. 얼마나 그것이 싫었으면, 옛 사람들은 지이산이라고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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