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위기, 혹은 위덕왕.....
늘 생각나지 않는 것이지만, 고구려본기 어느 왕대에서, 어느 권력자가 늘 자기에게 앉으려고 하니까, 항명 비슷한 것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고구려의 느낌과, 작가 자신의 의지가 일치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막상 읽어보면, 신라본기보다 아름답고, 백제본기보다 크고 웅장하며, 무슨 왕 이름이 대무신왕, 철학적이고, 아주 거대한 돌덩이 같고, 그러하다. 그러나 신라본기가 또한 장엄하고, 구관이 명관이고, 순전히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또한 사탄의 위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성립한 것도 순전히 고구려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이 사탄 같았다면, 어쩌면 중국이 거대하고, 북극까지 도달해서,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얼려죽이는 제단을, 환구단, 원구단, 뭐 그런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구려본기는 사탄 같고, 그러나 도무지 사탄 같지가 않다. 이렇게 읽어도 그렇고, 저렇게 읽어도 그렇다. 장수왕이라는 사탄의 이름을 갖고 있어도, 또한 소수림왕이 고구려 왕의 이름이다. 장수왕 장수왕 그런 식으로 살아남은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하는 철학을, 천년, 그런 것을 암시해도, 또한 광개토대왕이라고 가야에 침공한 일본 세력을 몰아내는 귀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심각한 결여이다. 너무 심각해서, 사람들이 제 명에 살면서도 평생 치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살아간다. 아주 작가주의 영화에서나,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이름을 대충 갖고 있으며, 이름이 사탄과 연결되어 있어서, 다만 그와 같은 번민과 고뇌 때문에 하루 일찍 죽는 사람의 연대기 같은 것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장수왕은 좋지 않은가? 한자로 하면 오래사는 것이지만, 우리말로 하면 다시금 고구려 왕의 느낌이 살아나니까 말이다.
사람은 대체 어느 정도로 없을 수 있을까? 바브라스트라이잰드. 이퓨고웨이. 미국을 내가 기차를 타건, 트레일러 트럭을 타건, 할리를 타건, 잉카의 후예 같은 일제 천씨씨 레플리카 바이크를 타건, 그들이 이름이 없음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나다니엘 홑온이, 그 시절 별로 아무 것도 없을 때 그것을 표현하였는데, 너무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겠다. 어째서 가미가제는 없음의 블랙홀을 따라, 미국인 친구를 그렇게 과격하게 찾아갔던 것일까? 그는 한국인이었을까?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 사람들보다도 오래 살았던 것일까? 광주에는 방림동이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람 이름을 방씨 성을 몇 명 알아도, 광주에 있는 행정 구역의 이름보다도 아름답지 않다. 화정동이라고 있었다. 있을 것이다. 과거형으로 내가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가미가제의 블랙홀을 내가 지금 겪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서울 이태원은 괜찮다. 그것은 사람 이름 같다. 테헤란로 같은 것은, 순전히 이름을 위해서 이란과 그렇게 교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방역에서 내가 내리다 보면, 나의 영혼에 어떤 것이, 혈루병 걸린 여인의 고사에처럼,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양도 괜찮다. 함흥도 괜찮다. 개성도 괜찮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일제를 겪고, 육이오를 겪어도, 위치를 알지 못하는 무진기행의 내용처럼, 이름의 덕례리를 훌륭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소설가는 김승옥, 혹은 유치환, 혹은 윤동주 했더라도, 별로 없었어도, 우리나라의 지명은 광주의 옛지명이 무진주이고, 사랑하는 도시의 이름이 진주이듯이, 삼국사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왕산도 괜찮다. 우리는 그렇게 괜찮은 이름을 지날 때 힘을 얻고, 이상한 이름을 지날 때 힘이 빠지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중국의 도시 이름들은 우리들의 케이스를 들어보아, 다 괜찮다고 하겠다. 고구려본기의 작가는, 한 사람의 삼분열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리켜서 하늘이 자기에게 앉으려는 것처럼,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슬프다고 했었다.
교육은 고구려본기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왕과 같은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삼손과 같이, 어린아이의 손에 이끌려, 경기장의 기둥을 밀어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에 빠지지 않고, 가족을 만나고, 적당히 여행하다가, 죽기를 소원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죽기 전의 주기도문 같은, 위대한 한 항목만 같다.
그렇다고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교육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중국과 일본을 보면, 그와 같은 뇌의 흔적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은 더욱 그와 같은 경사를 추진하여서, 의미 없는 발성과, 소음, 음악적 해체주의, 그런 것들로 먼지 털기 춤을 춘 다음에, 아름다운 리리씨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적고, 도시바 노트북에, 소니 카메라로 사진 찍고, 칼짜이즈, 게임용이라고 애교를 부린 데스크탑 퍼스널 컴퓨러에, 그런 블로그에, 홍어삼합 같은, 내용을 잘 적기 바라고, 소망하고, 그러다가 그와 같은 의식의 정중동 안에서, 비가 오거나, 첫 눈이 내리거나, 옛날 좋은 팝송이 거리에 깔릴 때, 한국인 친구와 만나서, 신현균과 만나서, 삼국사기의 후예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추궁하지 않으면서, 그런 한국인 친구의 이름을 많이 익히고, 은연중에, 그렇게 해체되었던 음악적 진행이 보기 좋은 고음으로 상승하기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원래는 그렇게 동경하였을 것이다. 가니타리 고진의 일본 정신의 기원 정사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일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이 혀를 사성으로 훈련하다가, 그것이 멈추고, 조사를 잘 사용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성이 별로 필요치 않는, 잔잔한 은파를 만나서, 의식이 고양되고, 마음이 상해에 다다르고, 임시정부를 행여 구성하면 그들을 후원하고, 배우고 익히고, 그것의 음색을 기억하고, 천년의 기획으로다가 친구를 많이 사귀고, 위대한 문호가 대국에 마침내 나타나기를 소원하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참 원구단 기획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현균의 몇 개 안되는 철학 용어, 항목, 그것의 한 개에 그치는 것으로다가 민족과 국가 전체가 제목 없음, 이름 없음, 간깨나이데쓰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니, 너무 그런 식으로 삼국이 구성되어서도 안되고, 별다른 문예 창작과 현상이 없는 것에서는, 그와 같은 경사마저 없어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삶은 늘 위기이다. 한자를 눈꼴 빠지게, 다른 위 자를 써낸다고 해도, 중국의 위나라는 다만 위구르, 위기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밥통 위와 같은 것이, 실질적인 문학적 표현 능력 같은 것이다. 장자의 첫번째 개념이 그래서 모호하고, 한국어 같고, 그런 이유가 거기서 드러난다 하겠다. 공자도, 맹자도, 순자도, 열자도, 어린 학생이 뭘 먹을 때마다, 눈물을 이유 있게 흘리게 하면, 말하고, 쓰고, 짓기도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는 것이다. 때리고, 패고 하면, 그래도 잘 먹는다고 하면, 자연적인 죽음이 닥치지 않는 이상, 그런 데에서도 살아남는다면, 그는 아마도 천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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