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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동메달

by 마음대로다 2017. 6. 26.

동메달






나는 한신대를 나왔다. 그렇다면, 다른 대학들은 다 악마대학들이고 학과들인가? 이것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 천주교도 그렇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유교 한다면, 가장 이름의 능력이 출중한 것이 천주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늘 천을 밑에 깔고, 밟고 다니기 때문에, 나의 상상력과 피치 못할 순간들 때문에, 천주교는 적어도 내게는 별로 이름과 귀신과 절대적인 능력이 없다 싶다. 그러나 민중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세계 천주교와 한국 천주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고, 불교와 유교, 하나는 가르침이 아니고, 다른 하나는 청마 유치환, 어린아이 때에 지적 직관으로나 경험을 했지, 나이가 들어서 그리 정통하고 막중한 것 같은 영혼의 경험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티비에서 사극의 카테고리가 많이 던져질 때마다, 며칠 사이에 콩이라는 공포 괴물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서 표현주의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범주적 사유의 연속으로다가' 그렇게 말을 계속하면서 킹콩이 마침내 일어서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마침내 역사마저도 카테고리가 되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가 내게도, 나의 기억에서도, 그리고 범주적 사유의 연속 안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사탄 때문이다. 사탄은 매순간 사람들의 초자아에 있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는 영화 속에서, 영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영화를 뚫고 나오면서, 그리고 영화와 상관 없는 사람들은 뉴스와 화제거리를 통해서, 그리고 나의 동메달 같은 글과 시 포토샾에서는 마치 내가 사탄과 먼 친척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곤 한다. 나의 글에 등급이 있다면, 내가 이런 과장된 표현을 해서 드러나게 된 높이에 의해서 그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이력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나의 이력서, 이런 이상한 말들이 한국어적으로 통용이 되고, 계속해서 로코모티브하게 연결이 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확률을 놓고 보자. 그것은 수학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말은 꾸러미와 같고, 그러나 그것들이 단어가 아니라 철자에까지 파괴가 이뤄진다면, 이미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마야라고 한다. 그래서 마야문명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이름 안에서, 한국어,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각형의 오코노미야키들이, 귀여운 동물들인지, 인간의 희극들인지, 개콘 같은, 아니면 사탄의 직접적인 툼 레이더 얼굴들인지, 더 이상의 판단의 아프리오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프리오리는 중요한 것이다. 둠스데이. 그러니까 움집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다만 리셋 되기만을 바라고 소망하는 종말주의자,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런 상태로, 어떤 새 사람을 받았다고 해보자.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점보 여객기 하늘 보고 흔들리는 여자가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었던 사울을 맞이했던 장면이 있다. 먹을 것을 사양하자, 계속해서 권했고, 마지못해서 먹었다는 내용이 나의 상상력이 덧붙여진 것인지, 아니면 성경 본문의 내용인지 헷갈리고, 그렇다. 사울이 불쌍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다윗은 깨끗한 것인가? 그리고 골리앗은 다윗에게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통해서 골릴 수 있었던 것일까? 다윗은 깨끗하다. 그렇게 깨끗할 수 없다. 시는 본시, 다만 한 행만을 가지고도 동메달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기울어졌는지, 당구의 치료사들이, 당구대에 기울기 장치를 설치해서 점검하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친구는 기울기를 갖고 있다. 우리가 좋은 친구를, 이성 친구 이상으로 선망하는 이유는, 그가 좋은 기울기를 갖고 있고, 돈 많은 점보 여객기가 아니라, 사울도 지나쳐, 다윗과 같은 사람일 것으로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뜬금 없는 말이지만, 나는 설인귀에 가까웠다. 그렇게 삼국사기를 읽고나면,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생각이 난다. 정말이지 삼국사기는 잘 쓰여진 작품인 것이다. 눈이 내려서 쌓이지 않고, 현대 도시의, 어둔, 가로등 밑에서 낙엽불가소, 마치 낙엽이나 꽃잎처럼 불려 지나치는 장면을 보게 되면, 그렇게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설인귀가 생각난다. 그는 좋은 기울기를 갖고 있는 것일까? 다윗을 보면, 햇빛도, 아침도, 신앙도, 설현도, 파란 하늘도 갖고 있는 것 같다. 사울과 다윗이 싸웠다는 내용도, 이처럼 기울기를 갖고 들여다 보게 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마음에 사무치고 그렇다. 여자 무당은 기본적으로 더럽다. 장수는 싸우다보니까, 더러워진다. 어떻게 다윗은 싸우기도 했으면서, 더러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어쩌면 사울이 그를 총애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울과 우리아의 얼굴이 겹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오리는 무엇인가? 눈 앞에서 보이는 얼굴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좀비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고, 문인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적이 있다. 더럽다고 느끼는 아프리오리는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천주교는 그것의 아프리오리가 같은 의미에서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