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아듣지 못할 말들의 소설 속
소설 속이라는 여자 이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냥갑 속의 사람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성냥갑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했던 성미향,
개존만한 법정, 하여튼
우리는 반드시 서태지
성냥갑 속의 소설 속을 돌아다니고자 하면
그는, 그녀는 적어도, 나한 정도는 되는 것이다.
고작 그 정도 관심에 그 정도의 정신적 지위가?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딱 하나 지위가 있는 것이
무슨 계단으로 사람을 올려주겠는가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는 허영이 많고, 결국에는 소설 속 사람을
잡아먹고, 동물과 사람의 메가맥스 썬더돔이나
펼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은
예수님이 문학하는 사람을 아끼고
더러운 종교인들을, 태초까지 아울러 저주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지금에야 그 이상한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조금 더 살아도
잘 알아듣지 못할 말들의 소설 속이나
걷게 되는 것이다.
계속 작은 소설
하나하나 모아서 거대하게
그렇게 순천 드라마 세트장을 짓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매장은
훈련이라는 미명하에,
종교적인 동물들이 출몰하는 곳이나
되고 만다.
동양 고전이 소인을 무시하고
군자를 이끌었던 것도
일종의 역설 같은 것이었는 것이다.
장자와 노자가 권력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 것도
사람들이 단순한 싸이즈 파워에
매몰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장자와 노자가 환영을 받게 된 것도
지금의 문명이, 어처구니 없는 영문학과
아름다운 프랑스 철학과
황비홍 철계투오공 같은 국문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인터 neiges
사람들끼리, 소인들끼리 잘 지내다가도
지령을 받아서 괴롭히는 일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들 잘 모르는 말들의 소설 속이라는
구조주의 때문이며, 실은 원래부터
싫었던 사람이거나, 그래도 되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메가박스 신봉자여서
그러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백제의 아무개 왕이
중국과 친교하여서 서신을 주고 받는데
고구려에서 출동하였다는 고사를
잊지 못한다.
고구려가 더 크거나
그것의 사랑이, 백제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서 그랬을 것이다.
출동한 군인은
우리 지금 오렌지 캬라멜 같은
한 세 명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