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또 어떤 영화일까?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단일종목 경기를 많이 보다가
무슨 말이냐면, 스케이트면 스케이트,
스키 점프면 스키 점프, 영화대 영화, 그렇게 보다가
그의 눈이 채 식기도 전에 서울 교보문고를
가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것의 관씨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로까지 흘러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사진 협찬에 감사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차일피일 그 사실을 숨긴채
그 어린 시절 쥐구멍에도 볕들 날을
지내는 것일 수 있다. 모든 의미는 중의적이고
다희적이며, 예쁘기도 하고, 자기 일에 빠져
무심하기도 하다.
이이제이(J)라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갖고 다른 영화나
소설들, 책들을 무시하는 전법을 쓰기도 하는데
하지만 우리의 처지는, 혹은 용기는
그것도 무섭고, 내내 무시했던 것도
무서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노래는 다만
솔베이지의 노래일 수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교보문고를 들어갈 때
지나치게 서울적이다는 느낌이 있다.
스메타나의 몰다우는
나를 향한 필승의 전법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음악 그 자체는
영원히 답이 없는 개인의 독립까지도
약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용무를 모두 마치고
나가면 세상 좋으나, 음악이 끝나고
나의 육체가, 세포가, 새로운 죽음
그와 같은 코너, 나의 말을 좀체 듣지 않는
범주들에 새로운 희생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
양세찬 급류와 같은 리듬 속에서
우리는 희한한 영화잡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영화가 있고
잡지가 있다는 것은, 일의 순서처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잡지를 보는데, 이게 무슨 영화인지
모르는 것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