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자기 이야기
가만 있는 클래식은 도무지 슬픈 내가 아니면
채워지는 것이 없다. 로마서를 읽어봐도,
혹은 다른 서신이었는지, 사도 바울이 자기를 따르라고 하였던
그것의 소대장 같은, 돌격 신호는, 구호는, 명령은
참 사람을 어이 없게 만들고
들라쿨루아의 그림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림이니까
한 장면이겠지만......
제임스 라스트의 슈베르트 즉흥곡도 좋다.
에어로 정한 것은
애니웨이
국어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답고, 진실되고, 짧고
수업 회피 기능이 있고, 오후에
마음으로는 누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이상하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와 같은 좌표를 지적하고 계신게다.....
내 대학생 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 대학생들은 내 눈에는
초등학생들 같고,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느냐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아름다운 여자와 성년식을
지냈던 적이 있다. 끝까지 가지는 않고
그것의 에니버서리 같은
쎄리모니를 함께
신촌에서 나누었던 것이다.
단칼에 미워한다
단칼에 좋아한다
단군왕검 그러니까
그렇게 두 살 많던 은행원 출신
중국학과 여대생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그 포즈가, 아름답기도 하고
나는 올웨이스의 창이나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여자?를 좋아했으나
정말 하드 하고,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같은 한신대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학습하던 여성이
신실해 보이고 했으나
그러니까 그 보는 즉시 마음에 들고
사랑하는 마음을 속일 수 없다는 말을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소개시켜준 것도 아니었다.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렇게 알아보고,
저렇게 알아보고
따릉따릉. 여보세요.
혹시 중국학과 여학생 방에 있나요?
전데요? 누구시죠?
그랬을 것이다.....
마이티를 타고 가다가
힘겹고, 힘들고
긴장되고, 다른 차들과도
아무런 차별이 없고,
나만 소외되었다고 해야 발언이 생기는데
다들 같은 모습이니까
참고 인내하고,
그러는 중에 그 여학생이 생각난 것이다.
만면에 웃음이
운전 중에
대청호에 생긴 얼음판들처럼
생겼었다....
우리는 모든 드라마가 끝이 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약에 약한 사람들을 처방할 때
처음에는 강한 약, 나중에는 약한 약
그것을 말하지 않고 처방하면서
병에 내성을 키우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한 번 초등학생의 드라마에 빠지게 되면
실제의 거리보다 더욱 그와 같은 거리를
좋아하고 사모하게 된다.
드라마를 그렇게 영원한 한 방으로만 여겨
살고, 지내게 되면 얼마나 억울한 것인가?
우리에게는 방이 여러 개 있고, 옛날에는 정말
가난해서 한 방에서 가족들이 지냈을 때가 있었지만,
지내다가 보면 그와 같은 드라마의 방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노래하는 방을 우리가 노래방이라고 부르듯이.....
대신에 노래방과 하나가 되어 있는 그와 같은 방을
다른 데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좋은 드라마를 기대하고
그것을 연속해서
무슨 헌법의 연속성마냥
좋아하고, 들떠 있는
그와 같은 시청지간의 프렐류드 같은
시간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싶다......
만일 지금의 추위와 엄습이
어떤 좋은 드라마와 병행하였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제일 화제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야한, 내 이름 같은 상태로
사랑을 만나볼 수 없는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는
여성 자유주의자라는 것이......
그것이 참 미인도이고
드라마는 그보다 등급이 낮고
별다른 작전이 없는
다만 파상공세와 같은 것이다.
중국학과 여학생은 일종의 철학적 카테고리론 같았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 쓰며
말씨가 클래식의 이악장 같은
내용까지도 수박화채 같은 사람은
도무지 중국인일 수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가볍게 데이트를 하고
신촌에서 만났으니
신촌에서 헤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