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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타낙(사탄학)과 우리들의 난제

by 마음대로다 2018. 3. 10.


사타낙(사탄학)과 우리들의 난제






사타낙이 대체 신학인지, 정치학인지, 유물론인지, 유명한 지방 요리인지 우리로서는, 자수성가, 잘 성찰할 수가 없다. 수가성의 여자에게, 남자들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것을 알아맞힌 예수 그리스도가, 참인지, 진짜인지, 우리로서는 요령부득, 다시금 연포탕처럼, 요령부득, 부득부득, 맛있게, 익어가는 모습과 냄새처럼,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강단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 사람이, 유독 주자에게만 결정적일 때 괴롭힘의 지령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일 것이나, 얼마나 주자는 수많은 사람과 그렇게 살아가는가? 성찰하면, 그 하나의 모습이 사탄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학인가? 아니면 수학인가? 아니면 우리가 물리력, 물리력, 할 때처럼 물리학인가? 군사학인가? 아니면 일종의 신과학 운동인가? 늘 사탄을 반면교사처럼, 찬양하는 헐리웃 영화와, 일본 영화를 보자면, 사타낙은 단지 불교의 신과학 운동적인 탱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사천왕들이 부처님 앞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싸가지 없는, 홍콩의 사대천왕 비슷하게, 그것의 수학적인 사실, 빼박,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 그렇게 꼼짝 없이, 분명 사찰의 입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타낙의 하수가 되는 것이다. 


낙타도 떠오른다. 타락천사도, 왕가휘, 그리고 아타락시아, 그리고 타락천사도 떠오른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실락원은, 셰익스피어가 코딱지 냄새가 가득한 존 밀튼에게, 후대의, 영문학 역사의 헤게모니를, 그렇게 한길사를 넘겨주었다는 뜻 밖에 아무 것도 없는것이다. 사타낙은 살아있다. 정확하고, 뚜렷하며, 호박에 박힌 모기의 피를 이용해서, 티라노를 만들어낸다는 기가 막힌 설정처럼, 사타낙은 정말이지 뚜렷한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대통룡을 뽑는 것이, 주자가 죽기 전까지 부지런히 뚜렷한 사타낙을 써내려가는 것과 비교하면, 등급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마치 우리나라가 대통룡 중심제라는 것을 말하고, 떠들고, 그와 같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타낙은 세계학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대통룡 중심제를 거절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엄격하면서, 세상 가장 정확한 문장들의 매질을 직접 만지면서도, 우리 대통룡의 지지율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런 등단 작가가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내 앞에서는, 알면서도 사람들이 핏물 같은 돈을 지불해서 그와 같은 책들을, 영화들을, 보고 구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자가 용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자가 현명하다고, 이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지만, 남자가 멋진 사관과 신사인 것처럼, 여자는 보편적인 논개인 것처럼,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처럼, 우리가 병만족장과 함께 또다시 종말론적인 그림을 그리면서까지, 둘이만 따로 물고기를 다듬으러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말이지, 오케스트라의 힘만 좋고 느자구 없는 금관 악기의 알 수 없는 계단처럼, 목관 악기의 더불어 반대 높이의 진행처럼, 고통만이 하늘 가득히 찬연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수학을 못했다. 그래서 서울대를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현균이가 서울대를 갔으면,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많이 했겠는가고 말이다. 이런 말의 진행조차 사타낙이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당황제, 그러니까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질료와 공간의 진행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수학까지도 잘했다면, 입학하여, 대학의 모든 학과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학생들이 늘 부족국가의, 예쁜 추장의 딸처럼, 불쌍하게 인디언 옷을 입고, 때로는 어색한 춤을 추면서, 돌아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우선인지, 사람이 우선인지, 아무도 모르는 뽀레스트. 대학이라는 것은 이제, 교육제도의 신화, 하나님의 신성이 사라지는 시간이기 때문인 것이고, 교육적 이념과 이상을 갖고, 상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저녁 무지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떻게, 교육제도가 있을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대통룡 중심제라고 하는 어색한 말의 난황까지도, 그나마 가능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타낙을 아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인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동양학, 수학, 수필, 나무, 그림, 굉장히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아름답고 짧은 평론이라는 말로 밖에는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면, 거지가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부자가 되는 것인가? 미국이나, 영국은, 거짓말을 많이 하면, 잘 아픈 척 눕거나, 유혹하고, 심지어는 마를린 심볼, 프리미어리그 사자가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사타낙 자체가, 이미 엄청난 격차인 것이고, 아주 아이들에게조차 심어지는 강력한 분별력인 것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면, 거지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 그들에게 다행인 것은, 돈 많은 거지가 되는 것이다. 돈 많은 거지는, 참혹하고, 최근 윤계상 주연의 범죄 도시를 찍기에 적합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너무 절묘한 것은, 성경에는 예수께 접근한 돈 많은 청년이 있었고, 다만 그가 사탄이나, 사타낙이라고 하지 않고, 낙타라고 칭하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계상 주연의 범죄 도시가 하찮게 탄생하였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하늘을 보고, 사탄이 미쳐 다른 데에 신경을 쓰느라고, 그들의 하늘 연탄 구멍을 닫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이 패권을 갖고, 성장하여, 한국 청년들처럼 죽기까지 하늘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에게도 재산이 없고, 정확하게 관리하다가, 아이들의 정신이 수위에 다다르면, 그렇게 연탄 뚜껑이 닫혀지면, 정확하게 정신은 죽게 되는 것이다. 


나를 보다가, 세상 출판물들을 보면, 사람들은 금세 그것을 알아차린다. 가뇽의 세컨 무브먼츠. 어떻게, 세상이 어떻게, 비갠 어게인으로, 사람들에게 그나마 정신의 틈입이 계속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인가? 나를 보다가 영화를 봐도 그렇다. 그들은, 출판하고, 상영하여, 돈을 번다. 마치 수준이 한 단계 낮아서, 그들에게는 그런 축복과 지지, 사람들의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정말이지 딱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 글이, 안토니오 네그리, 너무 정직하고, 정직한 대신에 가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시즌이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에 그렇지 않고, 차를 타고 수많은 도로를 지나고, 그들과 똑같이 밥 먹고, 맛있게 먹고, 티비 보고 똑같이, 그들과 일하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알아가지게 되자, 자기들의 문체와 소재주의, 내가 말하는 것처럼 소재가 진행의 팔할을 먹고 간다는 주장 혹은 입장, 하루키가 나처럼, 전체 인간들의 교양과 패턴을 파고들고자 하듯이, 적당히 꺼내면서, 고양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문체와 시간, 패턴이나 쳇바퀴가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도 같은 각성의 시간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세포라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하필,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가리켜서, 모나드라고 하였고, 발터 벤야민도 그것을 두고, 쌀알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괴물의 세포로 이뤄진 책인 경우, 사람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괴물의 세포로 이뤄진 영화라고 하면, 비유도 아니고, 직접적이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데, 책이라고 하고, 이론이라고 하고, 교주라고 하고, 김신조라고 하고, 박정희라고 하면, 그런 것들의 흥분제, 하루의 일은 하루로 족한, 일본식 료칸, 어째서 역사적 소재이자 사실의 기록 등을 사료라고 하는지, 머리가 이상하게 소머리 국밥처럼 되어가는 대학원 사람들을 보면, 그것이 정말이지 현대 신형 수소차의 디자인을 닮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거기까지, 지식의 고고학에까지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였는가? 사람들이 인문학을 놀고 먹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놀고 먹으면 절대 될 수 없고, 일만 주구장창해도 절대 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천국, 이화여자대학교, 왜냐하면 남자들도 너무나 근사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상적인 믿음이 있다면, 그들도 때가 되면, 열심히 일하고, 보다 현명하고, 아이디어가 다양하고, 심지어는 체력도 따라준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누가 서울대학교나 고려대, 연세대를 가려고 하겠는가? 세포는 심각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세포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그와 같은 세포에 민감해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세포를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세계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욱 우리나라의 세포를, 엘빈 토플러, 세계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서, 알아 보고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 것이다. 도대체가 수백년 근현대 미술사를 돌아다녀도, 이집트의 그림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고, 영국은 그와 같은 아름다운 문학적 전통에서, 누구는 있지도 않았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고, 실락원하여 혀가 잘린지 오래인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이나마, 아카데믹하게, 차리기 위해서, 남들 자랑하기 위해, 그 음습한 사타낙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경찰들도 어쩔 도리가 없어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 어려운 한국학을 공부해서, 남자건 여자건, 가슴이 암소의 것처럼 커지겠는가? 그것은 조롱이자, 믿음이고, 누가 최후의 인간이 되는지 모르겠는 세포이자, 뿌리가 없는 사탄들에, 같은 뿌리가 없는 기독교적 신앙심으로다가, 겨우 연장이나 해보려는 어리고 슬픈 시도인 것이다. 내가 다 좋아하고, 향유하고, 먹어보고, 사랑하고 해보았는데, 인간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암소나, 유방 같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죄다 유방이 되었고, 그러니 그것들이 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르겠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