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색은 있는 것이 좋다.
사람은 오토바이를 탈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여우비 쏟아지던 때와 만나게 된다. 소유라는 것이 그렇다. 소유는 그것의 한국말적, 한자적인, 형태와 집중과 같아서, 총알과 같다. 어떻게 인간은 세상에 덮이게 되었고, 천국과 지옥처럼, 포탄과 총탄의 경계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렇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슬프다. 슬픔은 통점과 같다. 여기가 아프신가요? 예. 그러면 여기가 아프신가요? 예. 그렇다면 여기는 어떤가요? 거기도 아픕니다. 그런 사람은, 전장에서, 우연히 언덕 위에 서서, 총탄을 거짐 여섯 개 이상을 맞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가 무서운지, 세례가 모르는지, 혹은 기도가 애틋한지. 포탄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을 때, 사람들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좋은 영화를 만들고. 옥희가 서울말을 쓰는 것이, 서울말을 쓰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서울말 자체가, 지금은 많이 전라도화되어 있는 것이, 옛날에는 개성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였다는데, 그런 서울말 자체가 슬픔이나 공포,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교육의 종묘 같은 것으로서, 어린아이 같고, 애틋함의 인토네이션을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이다. 꿈은 대게 서울 구경과 같고, 꿈은 대게, 나이 먹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즐기는 지방색의 탐구와 같다. 내 경우를 보면, 서울에서 꿈을 꾸었고, 강원도에서 지방색을 탐하였으며, 나이 들어서는 경상도로 오토바이 여행을 떠났던 것을 두고두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치 야바위처럼, 오늘은 경상도, 내일은 충청도, 모레는 후쿠오카, 글피는 칭따오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방색은 저마다 사찰 같고, 사찰과 별개로 있는 탑과 같고, 오래된 나무 같고, 바위 같고, 서울 사람이 지방으로 귀농을 가서, 성공한, 수백 년 이후의 사람들 같고, 지방 사람들이 서울의 빈 자리를 채우고, 그렇게 다시금 금의환향한 것도 같고 그렇다. 부분부분, 유튜브로 보는데, 그렇게 그림 같고,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에게 총살형을? 당하는 것 같고 그렇다. 생각은 대게, 어려우며, 그것의 진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해파리를 실제로 많이 닮아 있다. 우리가 눈물이 핑돈다 할 때 그 핑은, 실제로 총탄의 진행과 물리역학적으로 많이 닮아 있다. 우리가 엔진을 우연히 볼 때마다, 뭔가가 떠오르는데, 떠오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리하는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가, 다만 기계적인 것만 언급하는 이유도, 분명 우리의 생각이 저 무엇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차를 몰다가, 우리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단순화이거나, 유아적인 기억과 경험의 퇴행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옷이 군복이고, 그것을 상대하는 옷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전체를 통찰한 것 같으면서도, 다시금 무지의 공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국의 말이, 자국의 문학이, 그와 같은 계단 위에서, 자국의 성경이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보여줄 때, 그럼에도 그렇지 못하는 서양을 볼 때,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참담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포와 세계로 본다면, 지방색이 넘치는 한국 영화는 피난처와 같을 수 있다. 우리가 지방 사투리를 카톨릭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카톨릭은 내 친구이다. 교황은 모든 말이 약간 불분명하다. 귀하고, 높은 메시지이긴 하지만, 솔직하고, 담백하며, 훌륭한 어느 정신 권력의 수장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방색이 넘치고, 누군가 거기다가 창도 하고,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잼베도 연주하고, 그것이 그러니까 다만 보여주기식의 경험과 강요에 그치지 않는다면, 묘하게 서로를 유도하고, 넘어뜨리기 하며, 엎어치는 것이면, 대체 이 지방색은 누구의 것이며, 우리가 가는 길이 정말 킬로수로만 정리하는 것이 맞는지 묻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 사람들의 세계 탐방이 재밌고, 외국 사람들의 것이, 마치 가장 재밌고 훌륭한 것은 숨겨놓은 것처럼 평범하고, 촉촉하지 않고, 이상하게 골치 아픈 것이 되었다. 세계 정복이 먼저인가? 세계 탐방이 먼저인가? 우리가 십년 전만 해도, 정말 진심으로 세계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반대하였었다. 국가와 무력, 그것의 단순한 질서와 한계를, 막연하지만 누구도 반론하지 않을 레토릭으로 탑을 쌓았기 때문이다. 외국과 싸우다 보면, 우리는 지옥에도 연합할 수 있었다. 대게가 그런 식이었고, 거의 전부의 국제 역사가 그러했었다. 그러니 그때는 세계 정복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때는 그런 세계 탐방의 내용이 싫어서, 일부러 세계 정복을, 그러나 기존의 서양 세력의 정복은 싫어하는 것으로, 정신이 다소 어지럽고 혼미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우리는 지방색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금 모래성처럼 부서지는 것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육이오 때의 수 많은 탄흔을 갖고, 세계 탐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동남아의 풍경이, 그들의 고풍스러운 유적과 함께, 그렇게 감동을 준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원래 그렇게 예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양을,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 같은 지방색을, 카톨릭을 갖고 있다가, 그것의 정반합으로서의 바간과 앙코르와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피라미드처럼 선명하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러나 만남의 광장처럼, 사람들이 저마다의 오토바이를 갖고, 시끄럽게 떠들다 보면, 마음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벅차오르게 되는 것이다. 일본 말 중에, 가장 슬픈 것이 우마이이다. 그것은 총에 맞았거나, 칼에 맞았거나, 아픔이 깊거나, 크나큰 충격으로 거의 모든 기억을 잊었을 때, 강력한 지방색으로 드러나는 음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사무이는 아니다. 가슴은 옛날부터 아팠고, 칼에 맞았던지, 총에 맞았던지, 대신에 우마이 우마이 하면서, 건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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